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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10). 급보(急報)가 연잇고, 신립(申砬) 등이 달려 내려감
23/05/11 07:45:24 金 鍾國 조회 1158
10. 급보(急報)가 연잇고, 신립(申砬) 등이 달려 내려감
十七日早朝 邊報始至 乃左水使朴泓 狀啓他.
大臣 備邊司 會賓廳請對 不許 卽啓請 以李鎰爲巡邊使 下中路 成應吉爲左防禦使 下左道 趙儆爲右防禦使 下西路 劉克良爲助防將 守竹嶺 邊璣爲助防將 守鳥嶺 以慶州府尹尹仁涵 儒臣懦㤼 起復前江界府使邊應星 爲慶州府尹 皆令自 擇軍官以去.
俄而 釜山陷報又至. 時釜山受圍 人不能通 泓狀啓但云「登高而望 赤旗滿城中.」以此知城陷.
李鎰欲率京中精兵三百名去 取兵曹選兵案視之 皆閭閻市井白徒⋅胥吏⋅儒生居半. 臨時點閱 儒生具冠服持試卷 吏戴平頂巾 自愬求免者 充滿於庭 無可遣者. 鎰受命三日不發 不得已令鎰先行 使別將兪沃 隨後領去.

余啓兵曹判書洪汝諄不能治任 且軍士多怨可遞. 於是 金應南代爲判書 沈忠謙爲參判
臺諫啓請 宜使大臣爲體察使 檢督諸將. 首相以余應命 余請以金應南爲副 以前義州牧使金汝岉有武略 時汝岉坐事繫獄 啓請貸罪自隨. 募武士可堪裨將者 得八十餘人.
旣而急報絡繹 聞賊鋒已過密陽⋅大丘 將近嶺下. 余謂應南及申砬曰「寇深事已急矣 將若之何?」砬曰「鎰以孤軍在前 而無後繼 體察使雖下去 非戰將 何不使猛將星馳先下 爲鎰策應邪?」
觀砬意 欲自行援鎰 余與應南請對 啓如砬言 上卽召申砬問之 遂而砬爲都巡邊使.
砬出闕門外 自行招募 武士無願從者. 時余在中樞府治行事 砬至余所 見階庭間應募者簇立 色甚怒 指金判書謂余曰「如此公者 大監帶去安用? 小人願爲副使而去.」

余知砬怒武士不從己 笑曰「同是國事 何分彼此? 令公旣行急 吾所得軍官 可先帶行 吾當別募隨行.」因以軍官單子授之 砬遂回願庭中武士曰來 乃引之而出 諸人皆撫然而去. 金汝岉亦同去 意甚不樂
砬臨行 上引見 賜寶劍曰「李鑑以下不用命者 用此劒.」砬辭出 又詣賓廳見大臣 將下階 頭上紗帽忽落在地上 見者失色. 到龍仁 啓事狀中 不署其名 人或疑其心亂.

4월 17일 이른 아침에 변방의 급보가 처음으로 조정에 이르렀는데, 이는 곧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박홍(朴泓)의 장계(狀啓)였다.
대신들과 비변사(備邊司)가 빈청(賓廳)*1)에 모여서 임금에게 뵙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곧 글을 올려 청하여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가운데 길[中路]로 내려보내고, 성웅길(成應吉)을 좌방어사(左防禦使)로 삼아 왼쪽 길[左路]로 내려보내고, 조경(趙儆)을 우방어사(右防禦使)로 삼아 서쪽 길[西路]로 내려보내고,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아 죽령(竹嶺)*2)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을 삼아 조령(鳥嶺)*3)을 지키게 하고, 경주부윤(慶州府尹)*4) 윤인함(尹仁涵)이 유신(儒臣), 즉 문신으로 나약하고 겁이 많다고 해서 전 강계부사(江界府使) 변응성(邊應星)을 기복(起復)*5)시켜 경주부윤으로 삼아서 모두 스스로 군관(軍官 : 장교)을 가려서 데리고 가게 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에 부산(釜山)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또 이르렀다. 이때 부산은 적에게 포위를 당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교통할 수가 없었다. 박홍의 장계에는 다만 말하기를,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바라보니 깃발이 성 안에 가득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으로써 부산성(釜山城)이 함락된 것을 알았다. 이일(李鎰)이 서울 안에서 날랜 군사 3백명을 거느리고 가려고 하므로 병조(兵曹)에게 군사를 뽑은 문서를 가져다가 보았더니, 이는 다 여염집과 시정의 군사 경험이 없는 무리들이었다.
이 중에는 아전[胥使]과 유생(儒生)들이 그 반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임시로 검열을 해보았더니 유생들은 관복(冠服)을 갖추어 입고 과거시험 볼 때 쓰는 종이[시권(試券)]를 들고 있었으며, 아전들은 평정건(平頂巾)*6)을 쓰고 나와 있어 저마다 군사를 뽑는 데서 모면하기를 애쓰는 사람들만 뜰안에 가득하여 가히 보낼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일은 명령을 받은지 3일이 되도록 떠나지를 못하므로 할 수 없이 이일로 하여금 혼자서 먼저 떠나게 하고, 별장 유옥(兪沃)으로 하여금 뒤따라 군사를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나는 장계를 올려 <병조판서 홍여순(洪汝諄)은 맡은 일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또 군사들이 원망을 많이 하니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더니, 이에 김응남(金應南)을 그 대신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삼고, 심충겸(沈忠謙)을 병조참판(兵曹參判)*7)으로 삼았다.
대간(臺諫)*8)은 계청하기를, "마땅히 대신(大臣)을 체찰사(體察使)*9)로 삼아 모든 장수들을 검열하고 감독하게 하소서." 하였다. 수상(首相 : 李山海)은 나를 추천하여 체찰사의 명을 받게 되고, 나는 청원하여 김응남을 부사(副使)로 삼게 되었다. 전 의주목사(義州牧使) 김여물(金汝岉)*10)은 무인으로서의 지략이 있었는데, 이때 그는 어떤 사건에 관련되어 감옥에 갇혀 있었으므로 임금에게 계청(啓請)하여 죄를 면해 주고 자유로운 몸으로 군사를 따르게 하였다. 그리고 무사들 중에서 비장(裨將)*11)의 소임을 감당할 만한 사람을 모아 80여 명을 얻었다.

조금 뒤에 급보가 연달아 들어왔는데, 적의 선봉이 벌써 밀양(密陽)⋅대구(大丘)를 지나 장차 조령(鳥嶺) 밑에 가까이 왔다고 알려왔다. 나는 김응남과 신립(申砬)에게 일러 말하기를, "倭敵들이 깊이 들어왔으니 일은 이미 급하게 되었소. 장차 어떻게 하면 좋을는지?" 하니, 신립은 말하기를, "이일이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전방에 나가 있는데 뒤따를 군사가 없습니다. 체찰사(體察使 : 柳成龍)께서 비록 달려 내려가신다 하더라도 싸우는 장수는 아닙니다. 어째서 용맹스러운 장수로 하여금 급히 달려 먼저 내려가게 하여서 이일을 응원하게 하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내 신립의 뜻을 살펴보니 자신이 가서 이일을 구원하겠다는 것이므로, 나는 김응남과 함께 임금에게 신립의 말과 같이 아뢰니, 임금께서는 즉시 신립을 불러서 그 뜻을 물어보시고, 드디어는 신립을 도순변사(都巡邊使)*12)로 삼았다.

신립은 대궐문 밖으로 나가서 스스로 군사를 불러 모았으나 군사로서 따라가기를 원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 중추부(中樞府)*13)에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신립이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뜰안에 군관 응모자가 많이 늘어서 있는 것을 보고서 얼굴에 노기를 띠고 김판서(金判書 : 金應南)를 가리키며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분[金應南]을 대감께서 데리고 가서 무슨 일에 쓰시겠습니까? 소인이 부사(副使)가 되어 모시고 가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나는 신립이, 무사들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 것을 노여워하여 하는 말임을 알므로 웃으면서 말하기를, "다 같은 나랏일인데 어찌 이것저것을 구분하겠는가? 공은 이미 떠날 길이 급하니 내가 모집한 군관(軍官)을 데리고 먼저 떠나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나는 곧 따로 모아가지고 따라가리라." 하면서 인하여 군관의 단자(單子)*14)를 주니, 신립은 드디어 뜰안에 있는 무사들을 돌아보며,"따라오너라" 말한 다음, 곧 이끌고 나가니 여러 사람들은 다 실심한 모습으로 따라갔다.

김여물(金汝岉)도 역시 그와 함께 갔는데 속으로 몹시 좋아하지 않는 듯하였다. 신립이 떠날 때 임금께서는 그를 불러보시고 보검(寶劍)을 주시면서 말하기를, "이일(李鎰) 이하의 장수들로서 명령을 듣지 않는 자에게는 이 칼을 쓰도록 하여라." 하셨다. 신립은 임금께 하직하고 나와서 또 빈청(賓廳)으로 찾아와서 대신을 뵌 다음에 막 계단을 내려서려고 할 때 머리 위에 썼던 사모(紗帽)가 갑자기 땅에 떨어지니 보는 사람들이 실색하였다. 그런데 신립은 용인(龍仁)에 이르러 임금에게 장계를 올렸는데, 거기에 자기의 이름을 쓰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혹시 그 마음이 산란하여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1)빈청(賓廳) : 궁중에 있어, 대신(大臣)이나 비변사(備邊司)의 당상관(堂上官)들이 모여 중요한 일을 의논하던 곳.
*2)죽령(竹嶺) : 소백산맥(小白山脈)의 동북부에 있으며, 경상북도 풍기(豐基)와 충청북도 단양(丹陽) 사이의 큰 고개로 군사적 요지.
*3)조령(鳥嶺) : 경상북도 문경(聞慶)에서 충청북도 연풍(延豊)에 이르는 고개로 군사적 요지.

*4)부윤(府尹) : 조선조 때 동반(東班 : 문관)에 속한 외관(外官)으로 부(府)의 장관. 종2품 벼슬로 관찰사(觀察使)와 같은 품계(品階).
*5)기복(起復) : 기복출사(起復出仕)의 준말. 복상중(服喪中)에 있는 관리에게 상복(喪服)을 벗고 나와서 벼슬을 하게 하는 것.
*6)평정건(平頂巾) : 각(各) 관사(官司)의 아전(衙前)⋅서리(胥吏)들이 머리에 쓰던 두건.

*7)참판(參判) : 조선조 때 6조(六曹 : 이(吏)⋅호(戶)⋅병(兵)⋅예(禮)⋅공(工)⋅형조(刑曹))에 소속되었던 종2품의 관직. 일명 아당(亞堂)이라고 하는데 판서(判書) 다음가는 벼슬.
*8)대간(臺諫) : 조선조 때 간언(諫言)을 관장하는 관직으로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를 통틀어 말한다.
*9)체찰사(體察使) : 조선조 때 군관직(軍官職)의 하나. 나라에 전란이 있을 때 임금을 대신하여 지방으로 나가서 군무를 총찰하는 벼슬. 재상(宰相)이 겸임하는 것이 상례다.

*10)김여물(金汝岉, 1548∼1592) : 조선조 宣祖 때의 무관. 자는 사수(士秀),호는 피구(披裘)⋅외암(畏庵). 본관은 순천(順川)이다. 시호는 장의(壯毅)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의주목사(義州牧使)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의 부장으로 조령(鳥嶺) 탄금대(彈琴臺) 싸움에서 倭敵을 막다가 전사하였다.
*11)비장(裨將) : 감사(監司)⋅유수(留守)⋅병사(兵使)⋅수사(水使), 그리고 외국에 보내는 사신使臣(지난날, 나라의 명을 받아 외국에 파견되던 신하.)들을 따라 다니는 관원의 하나. 막객(幕客). 막료(幕僚).
*12(도순변사都巡邊使) : 순변사(巡邊使)는 도(道)의 군사 업무를 시찰하기 위해 파견하는 왕의 특사이다. 보통은 한 도의 업무만 살피게 하는데, 여기서는 여러 도의 일을 총괄하여 맡겼으므로 도순변사라고 했다. 당시 신립(申砬)은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에 임명되었다.
*13)중추부(中樞府) : 조선조 때 중앙관청의 하나. 출납(出納)⋅병기(兵機)⋅군정(軍政)⋅숙위(宿衛)⋅경비(警備)⋅차섭(差攝) 등의 일을 관장함. 정2품의 판사(判事)가 그 장관임.
*14)단자(單子) : 남에게 보내는 물건의 품명,수량과 보내는 사람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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