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

영남일보(2015. 7. 10)에 실린 달성학교 관련 자료
21/05/04 12:02:21 김정현 조회 1349
대구·경북 첫 근대학교 ‘달성학교’ 베일 벗다
박진관기자
2015-07-10
 

최극창·윤필오 등 10명 발기인 참여…“경북고등학교의 모태”
 
대한제국 광무 3년(1899) 7월에 작성된 대구·경북 최초의 근대학교 ‘사립 달성학교 창설취지급교칙(私立達城學敎創設趣旨及校則)’이 영남일보 위클리포유에 공개됐다. 작은 사진은 달성학교의 창설 발기인 명단.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구한말,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도 이 땅의 지식인은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며 교육에 희망을 걸었다. 그들은 신식 교육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고 개화와 계몽운동을 펼쳤다. 이런 가운데 근대학교가 생겨났다.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는 1883년 함경도 덕원, 원산 부민이 세운 사립 원산학교다. 그러면 대구 최초의 근대학교는 어디일까? 바로 달성학교다. 달성학교 설립발기인 중 한 명이며 교장을 역임했던 윤필오의 손부 허귀진 여사(93)가 달성학교의 실체를 상세히 알 수 있는 자료를 영남일보에 공개했다. 대한제국 광무3년(1899) 7월에 작성된 ‘사립 달성학교 창설취지급교칙(私立達城學敎創設趣旨及校則)’이다. 1993년 권대웅 전 대경대 교수가 이 자료를 열람한 뒤 이듬해 발표한 ‘한말 경북지방의 사립학교와 그 성격’이란 논문에서 달성학교에 대해 언급했으나, 학교 관련 내용이 언론에 소상히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달성학교는 1899년 4월 대한제국이 제정 공포한 중학교관제에 따라 경상감영 북문 안의 무너진 관아터에 문을 열었다. 발기인으로는 최극창, 박윤상, 윤필오, 강영상, 최상의, 정익조, 이인수, 장규원, 최영달, 추교정 등 10명이었다. 찬성원으로는 김직현(경상북도 관찰사), 김영호, 신경균, 서상욱, 김동식, 현방운, 양학수, 김의원, 박찬규, 공학순, 이소검, 정명수 등 12명이 이름을 올렸다. 학교 설립 취지문은 최극창, 장규원, 윤필오 등 3명이 썼다. 달성학교의 학제는 심상과(尋常科)와 고등과(高等科)로 돼 있다. 각각 수학 연한이 4년이고, 2년 과정의 일본어전수과를 뒀다. 권 전 교수에 의하면 심상과와 고등과로 구분한 것은 당시 일본의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학제에 심상과와 고등과를 구분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달성학교는 경상감영의 직속 교육기관인 낙육재와 양사재의 소유전답을 기초로 유지됐다고 한다. 달성학교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매달 10원의 보조금을 받았지만 광무 11년(1907) 보조금이 끊기고 지원금이 전액 삭감되면서 문을 닫았다.달성학교의 교육과정이나 교과과정은 신문화 또는 개화를 목적으로 편성됐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통감부가 학교운영에 여러 방법으로 제재를 가해 심상과는 1905년 대구공립소학교(현 대구초등)로 인계되고, 고등과는 1909년에 개교한 협성학교로 흡수됐다. 그 이전인 1907년 윤필오는 서상돈, 양기탁, 정재학, 서돈순 등과 함께 국채보상운동 모금액 중 6천700환의 자금을 마련해 이충구 경북도관찰사의 도움으로 대구군 동서 청사 자리를 얻어 협성학교를 설립·운영하기도 했으나, 박중양에 의해 폐쇄됐다. 대구지역 유림이 직접 관여했던 협성학교는 옛 향교(현 대구시 중구 교동 요셉의 집 및 그 일대)의 명륜당을 빌려 사용했다. 이 학교는 평양의 유지가 세운 대성학교와 더불어 삼남지역의 대표적인 학교였다.1916년 조선총독부는 고등보통학교관제를 제정했다. 이에 따라 5월, 향교 내에 있던 협성학교를 공립대구고등보통학교(약칭 대구고보·현 경북고 전신)에 병합시킨다. 대구고보의 모태가 바로 대구지역 ‘유지유림(有志儒林)’이 세운 사립 달성학교와 협성학교인 셈이다. 홍종흠 경북고 100년사 편찬위원장은 “2016년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는 경북고의 역사가 일본인에 의해 세워진 관립학교가 아닌, 지역 유지들이 세운 사립학교에서 태동했다는 것은 교육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경북고의 역사가 17년이나 앞당겨지는 셈”이라고 했다.임경희 대구경북소비자연맹회장(정치학 박사)은 “대구지역 근대교육의 효시가 서양 선교사나 일제가 아닌 개화한 지역의 유림에 의해 의도되고 실현됐다는 점은 대단히 고무할 만한 사실”이라고 했다. 그들이 뿌린 씨앗인 달성학교 졸업생들은 국권회복을 위한 구국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광복 후 나라의 동량이 됐다.이번 주 위클리포유 지이오는 사립 달성학교의 전모를 소개한다. 또 이 학교의 취지문을 공개한 허귀진 여사를 인터뷰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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