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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서원 약사
22/06/23 09:46:13 kim1435@hanmail.net 조회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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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가 2020년에 발행한< 대구지역 서원의 현황과 활용방안>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에 감사를 드립니다. 
 


구암서원龜巖書院
 

1. 구암서원의 역사
 
구암서원은 구계(龜溪) 서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65년(현종 6) 연구산(連龜山: 현 대구초등학교의 서남쪽 언덕) 기슭에 창건되었다. 이후 1718년(숙종 44) 동산동(東山洞) 구암(龜巖: 현 대구광역시 동산동 229번지) 아래로 이건하면서 사가 서거정을 합향하였고, 1741년(영조 17)에는 서성을, 그리고 1757년(영조 33)에는 서해를 추배하였다. 1778년(정조 2)에 사액을 받았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24년 유림의 공의로 동산동 옛 구암서원터에 복원되었으며 1991년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산 서당골 현 위치로 이건하여 2008년 유림의 발의로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550~1615)을 추가 배향하였다. 연암산은 달성에 세거하였던 달성서씨의 집성촌이었으며, 마을의 여러 곳에 채화당·일신재·용담재 등의 강학소와 서당이 많이 있었던 곳이라 서당골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2. 제향 서원의 인물
 
1) 서침(徐沉)

 서침은 자는 성묵(聖默), 호는 구계(龜溪)이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에게 성리학을 배웠고, 고려 말 조선 초의 변혁기에 향리인 달성(達城: 현재의 달성공원 일대)에 은거하여 이학(理學)에 전심하였다. 1424년(세종 6) 달성은 지형이 자연적으로 높은 성벽을 이루고 있어 군대의 훈련 등 군사요새로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세거지를 달성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도록 하고 그 보상책을 논의하도록 명하였다. 서침은 일체의 보상을 사양하고 대신 고을의 백성들이 납부하는 환곡(還穀)의 이자를 다섯 되씩 감해줄 것을 청하였다. 그의 뜻을 전해들은 세종은 매우 의롭게 여겨 이를 허락하고 특별히 연신지(蓮信池: 영선못으로 현재의 영선시장 자리)와 신지(新池: 현재의 서문시장) 일대의 토지에 대한 조세수취권은 물론 남산고역(南山古驛: 전 남산병원 일대)과 동산(東山) 일대의 땅을 하사하였다.
서침은 1433년 연산도호부사(延山都護府使)를 역임하고 이후 갑산군수·상호군·첨지중추원사·(全羅處置使)·영해부사(寧海府使)를 거쳐 삼남균전제처사(三南均田制處使)에 이르렀다.
 
2) 서거정(徐居正)
서거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이며, 권근(權近)의 외손자이다. 세종 26년(1444)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세조 2년(1456) 문과중시에 급제하였다. 세조 6년(1560) 사은사로 명나라에 들어가 그 곳의 학자들과 문장과 시를 논하며 찬사를 받았다. 귀국 후 대사헌이 되었고, 세조 10년(1464) 양관대제학이 되었다. 그 뒤 육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고, 성종 1년(1470)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그는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 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文風)을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하며, 26년 동안 문형(文衡)을 맡았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수많은 편찬 사업에 참여했으며, 그 자신도 뛰어난 문학 저술을 남겨, 조선 시대 관인문학이 절정을 이루었던 목릉성세(穆陵盛世)의 디딤돌 역할을 하였다. ≪경국대전≫·≪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동문선≫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왕명으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언해하였다. 저서로는 ≪역대연표(歷代年表)≫·≪동인시화≫·≪필원잡기(筆苑雜記)≫·≪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사가집(四佳集)≫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3) 서해(徐嶰)
서해는 본관은 달성, 자는 정지(挺之), 호는 함재(涵齋)이다. 예조참의를 지낸 서고(徐固)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았다. 타고난 품성이 영민하여 일찍부터 성리학을 연구함으로써 약관에 문장과 학문이 높았기에 사림의 존경을 받았으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적은 복주(福州, 지금의 安東)의 선비 이중립(李中立)이 쓴 뇌문(誄文)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4) 서사원(徐思遠)
서사원은 본관이 달성(達成)으로, 자는 행보(行甫), 호는 낙재(樂齋)이며, 구계(龜溪) 서침(徐沉)의 7세손이다. 학자이자 의병장으로, 평생을 교화와 덕행 및 효행으로 이름난 달성십현(達城十賢) 중의 한 명이다. 1575년(선조 8) 26세 때 향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만족하지 않고 초연히 구도(求道)의 뜻을 지니게 되었다. 4년 뒤인 30세 되던 해에 이천정사(伊川精舍)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의 학문은 주자학(朱子學)과 퇴계(退溪)에 그 연원을 두었고,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과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를 사우(師友)로 삼았고,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1553~1634)·괴헌(槐軒) 곽재겸(郭再謙, 1547~1615)·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1529~1590)·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1537~1597)·대암(大庵) 박성(朴惺, 1549~1606) 등과 교유하였다.
1584년(선조 17) 35세 되던 해에 학행으로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후 사임하였다. 1592년 (선조 25) 43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7월 공산성(公山城)에서 창의하여 의병대장이 되었고, 정유재란 때는 화왕산(火旺山) 회맹에도 참가하였다.
1595년(선조 28) 46세 때 신료들의 추천으로 청안현감(淸安縣監)에 부임하여 3년 동안 선정을 베풀었다. 청안현감을 그만두고 돌아왔을 때 그곳의 사림이 그의 은택을 잊지 못하여 사당을 세우고 구봉서원(龜峯書院)이라 이름하였다. 임진왜란이 종결된 후 1599년(50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하빈의 이천에 미락재(彌樂齋)를 짓고 강학에 힘썼다. 이후 17년 동안 개령(開寧)·옥과(玉果) ·연기(燕岐)의 현감, 형조·호조의 정랑(正郞), 역학교정(易學校正)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응하지 않고 후진의 강학에 전념하였다.
저작으로는 ≪낙재집(樂齋集)≫ 7권과, ≪낙재선생일기(樂齋先生日記)≫·≪낙재선생연보(樂齋先生年譜)≫ 등 6책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5) 서성(徐渻)
서성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달성,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峰)으로, 함재공(涵齋公) 서해(徐嶰)의 아들이다. 선조 19년(1586)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 황정욱(黃廷彧, 1532~1607)의 종사관으로 함경북도에 이르렀고, 황정욱 등이 두 왕자와 함께 왜군의 포로가 되었을 때 혼자 탈출하였다. 선조의 명령으로 행재소에 이르러 명장 유정을 접대하였고, 이후 암행어사로 삼남 지역을 순찰하고 돌아와 제용감정에 특진되었다. 또한 경상도를 비롯한 다섯 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형(刑)·병(兵)·호(戶)·공(工) 등 4조판서와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지충추부사를 지냈다. 1613년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11년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인조반정 후 풀려났으며,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인조를 호종하였다. 이인기(李麟奇, 1549~1631)·이호민(李好閔, 1553~1634) 등과 남지기로회를 조직하여 역학(易學)을 토론하였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4. 강학 활동
  구암서원 전경  구암서원배치도



구암서원의 강학 활동은 2016년 8월 구암서원을 중심으로 개원된 사단법인 영남선비문화수련원(이사장 서영택)에서 일임하고 있다. 매년 ‘대구시 교육청 보조금 사업’과 ‘유교문화 활성화 사업’으로 나누어 진행되고 있으며, ‘교육청 보조금 사업’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교훈 알기(사자소학 및 사자성어 쓰기)를, 그리고 ‘유교문화 활성화 사업’은 청소년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유교아카데미를 통해 동서양의 文·史·哲을 통해 생활 속의 인문학을 체험하며 문화적 교양인을 양성하기 위한 다양한 인문학 강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5. 향사 절차

 
향사는 매년 음력 9월 1일에 지냈다. 제향 인물의 직계 후손뿐만 아니라 대구 관내의 달성서씨 문중 서원인 이강서원(伊江書院)과 덕산서원(德山書院), 그리고 백원서원(百源書院)의 방계 후손들도 대거 참석하고 있으며, 기타 지역의 달성서씨 화수회에서도 참석하고 있다. 구암서원의 향사홀기(享祀笏記)와 축문(祝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諸執事先詣門外位○謁者引初獻官點視陳設○執事開櫝○開盖○謁者及贊引各引○獻官就外位○贊引引祝及諸執事入就拜位○再拜○鞠躬○拜○興○拜○興○平身○贊引引祝及諸執事詣盥洗位○盥洗○各就位○謁者及贊引各引獻官入就拜位○再拜○鞠躬○拜○興○拜○興○平身
 
行奠幣禮
謁者引初獻官詣盥洗位○盥洗○引詣制處使龜溪徐先生神位前跪○三上香○奠幣○俯伏興○次詣 文忠公四佳徐先生神位前跪○三上香○奠幣○俯伏興○次詣贈領議政涵齋徐先生神位前跪○三上香○奠幣○俯伏興○次詣文康公樂齋徐先生神位前跪○三上香○奠幣○俯伏興○次詣 忠肅公藥峯徐先生神位前跪○三上香○奠幣○俯伏興○引降復位
 
行初獻禮
謁者引初獻官詣制處使龜溪徐先生○尊所○引詣神位前跪○奠爵○俯伏興小退跪○祝取板跪于獻官之左○讀祝○俯伏興○次詣文忠公四佳徐先生尊所○引詣神位前跪○奠爵○俯伏興小退跪○祝取板跪于獻官之左○讀祝○俯伏興○次詣贈領議政涵齋徐先生尊所○引詣神位前跪○奠爵○俯伏興小退跪○祝取板跪于獻官之左○讀祝○俯伏興○次詣文康公樂齋徐先生尊所○引詣神位前跪○奠爵○俯伏興小退跪○祝取板跪于獻官之左○讀祝○俯伏興○次詣忠肅公藥峯徐先生尊所○引詣神位前跪○奠爵○俯伏興小退跪○祝取板跪于獻官之左○讀祝○俯伏興○引降復位
 
行亞獻禮
贊者引亞獻官詣盥洗位○盥洗○引詣制處使龜溪徐先生尊所○引詣神位前跪○奠爵○俯伏興○次詣文忠公四佳徐先生尊所○引詣神位前跪○奠爵○俯伏興○次詣贈領議政涵齋徐先生尊所○引詣神位前跪○奠爵○俯伏興○次詣 文康公樂齋徐先生尊所○引詣神位前跪○奠爵○俯伏興○次詣忠肅公藥峯徐先生尊所○引詣神位前跪○奠爵○俯伏興○引降復位
 
行終獻禮
贊者引終獻官詣盥洗位○盥洗○引詣制處使龜溪徐先生尊所○引詣神位前跪○奠爵○俯伏興○次詣文忠公四佳徐先生尊所○引詣神位前跪○奠爵○俯伏興○次詣贈領議政涵齋徐先生尊所○引詣神位前跪○奠爵○俯伏興○次詣文康公樂齋徐先生尊所○引詣神位前跪○奠爵○俯伏興○次詣忠肅公藥峯徐先生尊所○引詣神位前跪○奠爵○俯伏興○引降復位○獻官皆再拜○鞠躬○拜○興○拜○與○平身
 
行飲福禮
執事詣尊所以爵酌福酒○執事進减神位前○胙肉○謁者引初獻官詣飮福位○北向跪○祝進獻官之左以爵授獻官○獻官飲卒爵○執事受虛爵○祝北向以胙授獻官○獻官受胙○授執事俯伏興引降復位○再拜○獻官以下皆再拜○鞠躬○拜○興○拜○興○平身○撤籩豆○祝入撤籩豆○在位者皆再拜○鞠躬○拜○興○拜○興○平身
行望瘞位
謁者引初獻官詣望瘞位○北向立○祝取板及幣降自西階瘞坎○引降復位○謁者引初獻官贊引參引○獻官以次出○祝及諸執事皆復拜位○再拜○鞠躬○拜○興○拜○興○平身○以次出○贊者謁者贊引皆就及階間拜位○再拜以次出
 
祝文
龜溪先生 學闡性理, 才優經濟, 減糴惠民, 賴及百世.
四佳先生 感天誠孝, 鳴世文章, 淵海其博, 金玉其相.
涵齋先生 敬義夾持, 明誠兩進, 樂道好學, 遺風尚振.
樂齋先生 淵源退寒, 惠我光明, 遺風宛然, 百世攸程.
藥峯先生 學透天人, 才全文武, 有德有功, 烜爀今古.
 
6. 서원의 건축물
 
구암서원의 경내 건물은 사우(祠宇)인 3칸의 숭현사(崇賢祠)와 내삼문인 3칸의 경앙문(景仰門), 동재인 경례재(耕禮齋)와 서재인 누학재(耨學齋), 묘정비각(廟庭碑閣)과 전사청(典祀廳), 외삼문에 해당하는 연비루(鳶飛樓)와 백인당(百忍堂), 그리고 강당인 5칸의 초현당(招賢堂)이 지형과 조화를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강당인 초현당(招賢堂)



누경재 현판

  경앙문

 경앙문

구암서원은 외삼문에 해당하는 연비루(鳶飛樓)를 거처야 경내로 들어갈 수 있다. 연비루의 ‘연비(鳶飛)’는 ≪시경(詩經)·대아(大雅)· 한록(旱麓)≫편의 “솔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鳶飛戾天, 魚躍于淵)”에서 취하여 그 이름으로 삼았다. 연비루의 우측에는 2층 건물의 백인당(百忍堂)이 있는데, 이곳은 서원의 사무실 및 교육기능을 지원하는 역할과 유물을 보관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동재인 경례재
묘정비
백인당
연비루
전사청


연비루를 지나면 정면에 강당인 초현당(招賢堂)이 자리 잡고 있다. 계단을 오르면 정면으로 구암서원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지만 실제 당명(堂名)은 초현당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형태를 띠고 있다. 초현당은 본래 벽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중인방(中引枋)을 일컫는데, 정조 12년(1788) 중방(中牓)을 초현(招賢)으로 명명한데서 비롯되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강당의 좌측과 우측에는 각각 동재인 경례재(耕禮齋)와 서재인 누학재(耨學齋)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일반적인 서원의 동·서재와는 달리 지형의 특징을 이용하여 아래에 나무 기둥을 세워 지탱시킨 채 누각형태로 지었다. ‘경례(耕禮)’란 ‘예를 밭갈이 하듯 잘 닦는다’는 뜻으로,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학행(學行)≫편의 “도를 닦아서 도를 얻고, 덕을 구하여 덕을 얻는다.(耕道而得道, 獵德而得德.)”는 말에서 취하였고, ‘누학(耨學)’ 역시 ‘김을 매듯이 학문을 강론한다’는 뜻으로, ≪예기(禮記)·예운(禮運≫편의 “밭을 갈듯이 예를 닦고, 씨를 뿌리듯이 의를 펼치며, 김을 매듯이 학문을 강론하고, 곡식을 거둬들이듯 인을 근본으로 삼으며, 이를 편안하게 하듯이 악을 퍼뜨린다.”(修禮以耕之, 陳義以種之, 講學以耨之, 本仁以聚之, 播樂以安之.”)라고 한 데서 취하였다.
 

강당의 좌측에는 달성서씨의 족회(族會) 사적비(事蹟碑)와 묘정비각(廟庭碑閣)이 앞뒤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달성서씨의 족회 사적비는 1833년(순조 33) 5월 경상감사로 부임한 우난(友蘭) 서희순(徐憙淳, 1793~1857)이 이듬해 달성에서 화수회를 열고, 이 때 참석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개최한 시회(詩會)에서 모인 시를 비석에 새긴 것이다. 당시 화수회에는 대략 600여 명의 달성서씨가 참여하였고, 시회를 통하여 존조중본(尊祖重本)과 돈족목친(敦族睦親)을 다졌다고 한다. 대구와 인근 지역의 현존하는 시비(詩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정비각은 동산동 구 구암서원에서 이건한 중요 건물로서, 이곳에 비석이 세워진 것은 1758년(영조 34)의 일이고, 비각이 건립된 것은 1789년(정조 12)의 일이다. 비문에는 숭현사에 봉안된 4인을 제향한 연유와 서원의 내력이 적혀있다. 비각의 비문은 약봉(藥峯)의 현손인 퇴헌(退軒) 서종금이 짓고, 5세손 서명선이 전액(篆額)을 썼다. 그리고 비음(碑陰)의 글씨는 6세손 어모장군(禦侮將軍) 서무수가 썼다. 서종금은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으며, 서명선은 병조판서를 지냈다.
강당을 기준으로 우측에는 향사(享祀)를 올릴 때 제수(祭需)를 장만하는 공간으로 사용되는 정면 3칸의 전사청(典祀廳)이 자리 잡고 있다.

사우(祠宇)인 숭현사(崇賢祠)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집의 맞배지붕 양식이다. 구암서원의 출발이 연구산(連龜山) 기슭의 숭현사이기 때문에 숭현사의 확장이 곧 구암서원이며, 숭현사 건물과 내용의 실체는 동산동의 구 구암서원에서 완성되었다. 현재의 숭현사는 동산동 숭현사를 그대로 이건하여 보수한 것으로, 별도의 내삼문인 경앙문(景仰門)이 두어 서원의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을 엄격하게 구분하였다. 중앙에는 서침과 서거정의 위패가, 오른편에는 서해, 왼쪽에는 서성의 위패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
  
현재 구 구암서원은 대구전통문화센터로 운영되고 있어, 전통문화체험과 한옥숙박체험 및 전통혼례체험을 할 수 있다. 한옥숙박체험에 제공되는 객실은 수강당·친목당·복연당·애심당·한별당 등 총 다섯 곳에서 가능하며, 수강당을 제외하고는 2명의 투숙이 가능하다. 또한 이곳은 대구관광 스탬프트레일 코스 중 하나로서, 지정된 관광 명소를 방문하여 스탬프를 모두 받으면 대구관광 명예홍보위원으로 위촉된다. 그리고 서원의 마당과 뒤편에는 상시로 투호·널뛰기·제기차기·활쏘기 등의 놀이를 즐길 수 있는 전통놀이 체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7. 서원 관련 자료
 숭현사

○ 구암서원묘정비명(龜巖書院廟庭碑銘)
한 고을의 이름난 선비가 도학(道學)과 행의(行誼)가 후생에게 본보기가 되어 대궐 안팎으로 드러나면 그를 제사로 모시니, 이는 진실을 근거로 예로부터 이른바 ‘고을의 선생이 돌아가시면 반드시 제를 올린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의 은혜가 한 고을에 두루 미치고 은택이 끝없이 흘러내려 오래될수록 더욱 잊히지 않는 분이라면 그 은덕에 보답하기를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대구의 달성은 곧 우리 서씨가 성을 갖게 된 이후로 세거(世居)한 곳이다. 지형은 말[斗]처럼 우묵하고 주위는 천혜(天惠)의 요건을 갖추었으니, 영남에서 중심이 되는 도회이다. 예전 세종조에 여기에 성을 축조하고 창고와 관청을 만들기 위해 그 땅에 대한 보상을 의논한 일이 있었다. 이 때 구암선생(龜巖先生)이란 분이 같은 마을의 사람들과 함께 조정의 명에 따라 남산(南山)의 옛 역참터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 그럼에도 국가의 보상을 사양하면서 대구부의 백성들이 납부하는 환곡(還穀)의 이자를 한 섬에 다섯 되씩 줄여주기를 청하여 온 마을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게 하였다. 이런 사실은 여러 사람의 기록과 ≪대구읍지≫에 실려 있으니, 이는 우리나라 360고을 가운데에 유일한 것이다.
무릇 쌀을 빌려주고 거두어들이는 환곡은 고을의 큰 행정이니, 한 말에 한 되의 이자는 실로 고금에 바뀌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부유한 집이 아니면 빌릴 때는 즐거우나 갚을 때는 곤란함을 끝내 면하지 못한다. 가난한 백성들은 일 년 내내 괴롭게 일하여도 가마니에 저장해 둔 곡식이 없기에 고을의 아전이 날뛰고 설치며 관청에서 닦달하게 되면, 솥과 송아지를 팔더라도 모자라는 부분을 다 채울 수가 없다. 이러한 때에 한 되나 한 홉을 덜어주더라도 감사의 송덕비를 세우는 것이 급할 것이거늘, 하물며 한 부(府)의 백성의 가구가 몇 천 가구이나 되고 환곡의 이자가 몇 천 석(石)이나 되는지 모를 정도로 많음에 있어서랴!
집집마다 한 섬에 다섯 되로 계산해 볼 때 천 가구이면 5천 되가 되고, 만 가구이면 5만 되나 된다. 지금까지 4백여 년 가량 되었으니, 그것을 합한 숫자는 계산에 아마도 셈에 뛰어난 사람이라도 계산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마다 은혜를 입어 천만년이 지난다면 그 백성을 이롭게 한 정책은 넓고 길 것이며, 백성을 사랑한 뜻 또한 은미하고 심원할 것이다.
아! 만일 공이 조정에 나아가 이러한 마음을 미루어 정치를 하였다면 백성들을 모두 착하게 하되 반드시 올바른 방도를 갖추게 할 것인데, 애석하게도 한 고을의 백성에게만 은택을 끼치고 온 나라에 두루 미치지는 못하였도다.
옛날 경상초(庚桑楚: 노자의 제자)가 외루(畏壘)에 3년을 살았는데, 외루 땅에 크게 풍년이 들자 백성들이 모여 그를 제사지냈다. 주자(朱子)께서 일찍이 장자(莊子)가 말한 뜻을 취하여 암자에 편액하였으니, 그것을 흠모함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대저 외루의 백성들은 3년간 풍년을 얻은 데 불과했으나 오히려 그를 성인에 가깝다고 여겼으니, 지금 대구부의 백성들이 공의 은덕을 갚고자 한다면 온 고을이 집집마다 신주와 제문을 갖추어 제사지내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현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숭현사(崇賢祠)를 대구부의 남쪽에 창건하였으니, 어찌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었겠는가? 수십 년 뒤에 원근의 선비들이 공론을 일으키고 정성을 함께 하여 달성(達城) 구암(龜巖)의 북쪽으로 이건하였으니, 이곳은 바로 선생이 살았던 옛 마을이다. 옛 제도에 따라 크게 단장하고 우리 방조(傍祖)인 사가선생(四佳先生)과 우리 선조인 함재(涵齋)와 약봉(藥峯) 두 선생을 차례로 추향(追享)하였다.
사가공(四佳公)은 이 지방에서 이름을 떨쳤는데, 문장과 재주가 뛰어나 세조 때 의정부(議政府)를 맡아 다스렸다. 함재공(涵齋公)은 퇴계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덕행이 순수하고 지극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약봉공(藥峯公)은 선조가 임진왜란을 평정한 초기에 본도(本道)를 맡아 지키면서 그 공적이 성대하게 드러나 고향 사람들이 대대로 받들어 섬긴 분이다. 실로 이분들이 머물렀던 자취가 있다면 앞에서도 이른바 향선생(鄕先生)으로 제사지내야 마땅하고, 항렬에 따라 신위(神位)를 모신 사당을 지었으니, 참으로 성대한 일이도다. 또한 이 서원이 건립된 것이 어찌 달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구계공의 후손 한중(漢重)이 일찍이 사당 뜰에 세울 비석을 다듬어 놓았다가 일을 끝내지 못하였는데, 지금 아들 옥(鈺)이 부친의 뜻을 잇고자 천리 먼 길을 달려와 나에게 비문을 서술해 주길 청하니, 장차 빗돌에 새겨 비석으로 세우려는 것이다. 돌아보니 나는 정신이 흐리고 문장이 졸렬하여 실로 이분들의 공적을 펼쳐 드러낼 수 없지만, 이는 우리 서씨의 실제 계보(系譜)와 가승(家乘)에 관계된 일이거늘 어찌 끝내 사양할 수 있겠는가?
구계공의 휘(諱)는 침(沈)으로, 전의소감제처사(典醫少監制處使)를 지냈다. 보계(譜係)는 고려 태조부터 시작되는데, 판도판서(版圖判書) 휘 진(晉)을 시조로 하니, 바로 공의 고조부이시다. 고(考)의 휘는 균형(均衡)으로, 공민왕 경자년(1360)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정평공(貞平公)이시고, 비(妣)는 광산김씨 원명(遠鳴)의 따님이시다. 공의 묘소는 북산(北山) 중심리(中心里) 간좌(艮坐)의 언덕에 있는데, 부인 이씨와 위아래로 묘터를 잡았으며, 자손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번성하다. 공의 행적은 징험할 수 없을 정도로 세대가 멀지만 백성을 위한 하나의 사실로도 충분히 후손들에게 경사로 남을 것이다.
사가의 휘는 거정(居正)으로, 공과 관향(貫鄕)은 같지만 계파가 다를 뿐이다. 벼슬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고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함재의 휘는 해(嶰)로, 사가의 종증손이다. 불행히 일찍 돌아가셨으나 그의 언행은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 지역)의 훌륭한 선비 이중립(李中立)이 지은 뇌문(誄文)에 실려 있다. 약봉의 휘는 성(渻)으로, 함재공의 아들이다. 벼슬이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고, 시호가 충숙(忠肅)이다. 두 공(公)의 업적은 찬란히 국사(國史)에 널리 실려 있으니, 새삼 다시 덧붙이지 않고 명(銘)을 짓노라.
 
一鄕之士, 道學行誼, 儀範後生則祀之, 仕䆠功業, 布顯中外則祀之, 洵是古所謂鄕先生沒而可祭者也. 如其施遍於一同, 澤流於無垠, 愈久而愈不可忘者, 則其所以崇報之者, 是尤曷可少耶. 惟玆大丘之達城, 卽我徐氏得姓以來世居之地. 地形斗隩, 周遭天作, 嶺以南一都會之要區也. 昔在世宗朝, 爲設城庫, 官其地而論其賞. 時則有龜巖先生, 與一村同人依朝命, 徙居于南山故驛基. 辭其賞而願减本府糴耗, 逐石五升以惠民. 此載於諸家掌故及本府邑誌, 而我東三百六十州之所獨有也. 夫糶糴之法, 爲州家之一大政, 而每一斗耗一升, 實古今不易之規. 然而自非富室豪戶, 終不免樂於受而艱於納. 若乃蔀屋小民, 終歲作苦, 無擔石之儲, 而吏胥之所隳突, 官府之所捶撻, 挈買鼎犢, 猶未能完欠. 於此而有一升龠之捐, 猶當銘謝感頌之不暇, 况此一府之民, 不知幾千戶, 糴糓不知幾千石. 戶戶石石, 計其五升, 千爲千五升焉, 萬爲萬五升焉. 而今且至四百年所, 則積之之數, 殆均歷之所不能筭. 而人人之受其辭, 卛是將千萬歲, 其利民之政普而長, 愛人之意微而遠矣. 噫! 如使公進爲於朝, 推是心而行乎政, 則其所以兼善一國之民者, 必有其道, 而惜乎專一州而不咸焉耳. 昔庚桑楚居畏壘三年, 畏壘大穰, 畏壘之民, 相與俎豆之. 朱夫子嘗取其義而扁諸菴, 其所慕尙者深矣. 夫畏壘之民, 不過得三年之穰, 而其猶曰庶幾其聖人乎. 則今丘之民, 欲報我公之德者, 雖環一州家尸而戶祝之, 未足爲泰. 而至顯宗朝, 始創崇賢祠于府南, 夫豈有待而然歟? 後數十年, 遠近章甫, 倡議齊誠, 移建于達城龜巖之北, 乃先生之故里也. 因其舊制而崇餙之, 又以我傍祖四佳先生曁我先祖涵齋, 藥峯兩先生次第追享. 蓋四佳公奮跡玆土, 以文章才猷, 際遇光陵, 贊治黃閣. 涵齋公受業退陶, 德行純至, 爲士林所推仰. 藥峯公當宣廟重恢之初, 守臬本道, 功勞茂著, 均爲貫鄕世篤之賢. 而實有杖屨茇舍之跡, 則向所謂鄕先生可祭者皆是也, 而仍成族位之祠, 吁其盛矣, 亦豈非斯院之作, 實原於達城而然耶? 龜巖公後孫漢重, 曾營竪碑於廟庭, 旣伐石而工未訖, 今其子鈺爲繼先志, 不遠千里, 屬余以叙述, 將刻畫而樹之. 顧余神思耄昏, 文詞荒拙, 固不足以鋪張闡揄, 而此於我徐氏, 實係家乘中事, 則亦何敢終辭也? 龜巖公諱沉, 典醫少監制處使. 譜自麗朝版圖判書諱晉始, 於公爲高祖. 考諱匀衡, 恭愍庚子文科政堂文學貞度公, 妣光山金氏遠鳴之女也. 公墓在府北南山中艮坐原, 與配李氏爲上下塋, 子姓訖今蕃衍, 公之行蹟, 世遠莫徵, 而卽此一事, 宜其有餘慶也. 四佳諱居正, 與公籍同而派異, 官左贊成典文衡達城君. 涵齋諱嶰, 四佳之從曾孫, 不幸蚤世. 言行備載於福州高士李中立誄文, 藥峯諱渻, 涵齋之子也, 官判中樞, 謚忠肅. 二公事業, 爛焉在國史. 玆不復贅云, 銘曰.
 
찬란한 달성 땅은 奕奕達城
우리 서씨로부터 비롯된 터전이니 肇基我徐
신령한 근원이 널리 퍼져 靈根布濩
맑은 기운이 돕는 명당이라. 淑氣扶輿
인걸은 산의 정기로 태어나고 人維岳降
땅 또한 하늘이 내린 풍요로운 곳이니 地亦天府
구계공(龜溪公) 같은 분이 有若龜翁
진실로 이 땅에 살았다네. 寔世其土
관(官)이 이곳에 축성(築城)하고자 官爲設險
후한 대가를 주려 하였으나 方且厚酬
공은 머리 흔들어 사양하셨으니 公則掉頭
구하는 바가 남다름이 있었다네. 異乎人求
우리의 옛 터전을 버리고 捨我靑氊
온 일족 사람들과 옮겨 살면서 同此闔境
다섯 되 줄여주길 청하니 耗蠲五升
환곡(還穀) 이자 새롭게 되었다네. 糴報新政
어진 사람이 널리 이로움 끼쳐 仁人利博
만세토록 그 은혜 입게 되었으니 萬世永賴
이 서원을 보살펴서 有翼祠宮
그 공에 보답하기를 게을리 말지어다. 報事無怠
백성들 순박하니 民之質矣
어찌 은혜를 모르겠는가? 汝豈知蒙
환곡 갚는 길에 서원을 지나며 糴路院下
또한 몸을 굽혀 공경하리니. 亦祗以躬
이에 우리 삼현(三賢)까지 越我三賢
향렬대로 받드니 奉以族位
문충공(文忠公)은 고아한 문장으로 文忠鳴雅
남기신 향기로움 끝이 없으리라. 遺芬未沫
함재공(涵齋公)의 돈독한 뜻 涵齋篤志
충숙공(忠肅公)이 크게 이었으니 忠肅大之
아름답고 찬란한 공덕에 德懿事功
이곳에서 제사지낼 만하네. 可祭在斯
고향 마을은 영광을 더하고 梓里增光
남기신 은택은 변함이 없으니 棠陰依舊
달성은 영원히 손상되지 않고 達城不騫
구암서원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으리. 龜巖不仆
해마다 歲歲年年
풍성하고 깨끗한 제물로 제사 드리고 豆爵㓗豊
그 공적을 돌에 새겨 銘于麗牲
사당 가운데에 우뚝하게 세우노라. 屹立唐中
 
충숙공(忠肅公) 4세손 숭정대부치사봉조하(崇政大夫致仕奉朝賀) 종급(宗伋)이 짓고, 5세손 병조참판(兵曹參判) 명신(命臣)이 전서로 비액(碑額)을 쓰며, 6세손 행세자익위사위솔(行世子翊衛司衛率) 무수(懋修)가 비문을 쓰다.
 
○ 구계(龜溪) 서선생(徐先生) 묘갈(墓碣)
옛날 구계(龜溪) 서(徐)선생은 달성(達城)의 산속에 은거하며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고, 날마다 문하의 제자들과 함께 경전과 도를 강론하였다. 비록 곤궁하였지만 독선(獨善)을 행하면서 일상생활에서 인민애물(仁民愛物)을 진심으로 실행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세종(世宗) 때 남쪽 변방에 삼포(三浦)를 개설하였는데, 해마다 왜구들의 침입이 있어 고을마다 성을 쌓아 삼엄하게 지켰다. 이 때 조정에서는 공이 살고 있는 곳의 지형이 두형(斗形)이어서 성을 쌓을 만한 천혜의 요새라는 보고를 받고, 남산의 옛 역 터를 내주면서 그 택지와 바꾼다면 보상을 논의하여 대대로 내리는 녹봉에 보태어 주겠다는 교명(敎命)이 내려졌다. 이에 공께서는 그 보상을 사양하고 받지 않으면서, “왕의 영토가 아닌 곳이 없는데 어찌 보상이 있을 수 있으리오.”라고 말하였다. 교명을 고사하면서 말하기를, “한 집안에 이익이 되는 은택을 어찌 만백성에게 널리 베푸는 시혜(施惠)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우리 고을의 적모축석(糴耗逐石)에서 다섯 되를 경감해주시어 백 대에 길이 남을 조정의 특이한 은전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의로운 일이라 여기고 허락해주었으며, 마침내 고을전체의 상제(常制)가 되었고,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그 혜택을 받으며 송덕의 글이 끊이지 않으니, 이른바 “힘써 덕을 펴서 그 덕이 아래에 미쳤으니 백성들이 그를 우러러 본다.”라는 것이 공을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니겠는가? 공의 이름은 침(沉), 자는 성묵(聖黙)이며, 구계(龜溪)는 호이고, 달성(達城) 서씨(徐氏)이다. 가계(家系)는 고려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진(晉)이 공의 고조가 되고, 증조는 도관좌랑(都官佐郞)을 지낸 기준(奇俊)이며, 조부 영(穎)은 중대광(重大匡)에 오르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부친 균형(均衡)은 공민왕(恭愍王) 경자년(1360)에 포은(圃隱) 등과 함께 과거에 동방급제(同榜及第)하여 봉정대부(奉政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정평공(貞平公)이고, 모친은 광산(光山) 김원명(金遠鳴)의 따님이다. 공은 조선에 들어와서 첫 벼슬로 조봉대부(朝奉大夫) 전의소감(典醫少監)에 제수되었고, 세종 때 재주와 명망으로 삼남균전제처사(三南均田制處使)를 지냈다. 공은 일찍이 포은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특히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대해 강론하고 질문하며 배우고 익혔다. 날마다 부지런히 힘써 매진하였고, 병이 심해지지 않으면 언제나 새벽에 일어나 분향하고 글을 읽었으며, 성인의 가르침을 완미(玩味)하기를 마치 입이 고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하였다. 학문에 나아간 공력이 늘그막에는 더욱 독실해져 생도들이 문하에 줄을 이었는데, 그들을 각자의 재능에 맞게 가르쳐 성취를 이룬 자가 많았다.
부인은 고려 때 동궁첨사(東宮詹事)를 지낸 고성이씨(固城李氏) 을방(乙芳)의 따님으로 판우군(判右軍) 은암(隱庵) 이백(李伯)의 손녀이다. 공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광흥창(廣興倉)의 부승(副丞)을 지낸 문한(文翰),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낸 문간(文幹)이 있고, 문덕(文德)은 부사(府使)를 지낸 공의 동생 습(漝)에게 출계(出系)하여 후사를 이었다. 문한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현감을 지낸 제(濟), 문과에 급제하여 학유(學諭)를 지낸 도(渡),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섭(涉)이다. 문간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감찰(監察)을 지낸 근중(近中)이다. 제는 아들 셋을 두었으니, 맹원(孟元)·중원(仲元)·계원(季元)이다. 도는 아들 넷을 두었으니, 진사 지원(智元), 문과에 급제한 인원(仁元), 진사 용원(勇元), 진사로 훈도(訓導)를 지낸 숙원(叔元)이다. 섭은 아들 넷을 두었으니, 진사 진원(震元), 생원 감원(坎元)·간원(艮元)·태원(兌元)이다. 근중은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직장(直長)을 지낸 진손(震孫)·태손(兌孫)·중손(仲孫)·주부(主簿)를 지낸 건손(乾孫), 현감을 지낸 의손(義孫)이다. 현손(玄孫) 이후는 번잡하여 다 기록하지 않지만, 공의 후손으로 이름이 알려진 유학자가 많았다.
7세손 낙재(樂齋) 사원(思遠)은 정랑(正郞)을 지냈다. 퇴계(退溪)선생을 사숙(私淑)하고 한강(寒岡)·여헌(旅軒)과는 사우(師友)로 교유하였으며, 도와 덕행, 명예와 절조로 사림의 사표가 되었다. 우리 고을의 이강서원(伊江書院)과 청안(淸安)의 구봉서원(龜峯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동고(東皐) 사선(思選)은 사원의 종제로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역시 학행으로 추앙받아 경산(慶山)의 옥천사(玉川祠)에 제향되었다. 8세손 전귀당(全歸堂) 시립(時立)은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효행으로 좌랑(佐郞)에 증직되었고, 우리 고을의 백원서원(百源書院)에 제향되었다.
아! 공이 살던 세상은 지금 400여 년이나 흘렀고, 이미 연대가 먼데다가 여러 번의 병화를 거치면서 문헌으로는 고증할 수가 없다. 공의 생몰연대와 도(道)의 얕고 깊음은 물론 관직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 길이 없는데, 오직 적모축석을 경감했던 이 한 가지 일만이 오래토록 길이 남을 은택이 되었다. 고을 사람들에게 미치는 혜택이 컸으므로 기뻐하며 칭송하면서, 오래도록 잊지 못하여 집집마다 축송하기에 이르렀다.
현종 을사년(1665)에 구암서원(龜岩書院)을 건립하여 제향하였다. 묘소는 팔공산(八公山) 중심촌(中心村)의 간좌(艮坐) 언덕에 부인 이씨와 함께 상하(上下)로 조성되었다. 옛날에는 묘도에 표석(表石)도 없었으나 지금 비로소 한 경지(境地)를 만들게 되었는데, 선비와 아녀자 할 것 없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그 역사(役事)에 즐거이 참여하니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아득히 먼 후생으로서, 공의 유풍(遺風)을 소문으로만 듣고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깊었는데, 근자에 공의 먼 후손 식(栻)이 나를 찾아와서 묘도에 세울 글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실로 덕이 없고 글 짓는 재주가 졸렬한 사람으로,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극구 다시 청하기에, 마침내 두려움을 무릅쓰고 그 사실을 약술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명(銘)을 짓노라.
 
越昔龜溪徐先生, 隱居達城山中, 不求聞達, 日與門弟子談經講道. 雖窮居, 獨善而未嘗不以仁民愛物爲心矣. 時當世宗朝南邉三浦, 嵗有倭警, 列邑之城守方嚴. 朝廷聞公所居地形如斗, 天塹可城, 命以南山故驛基換其宅, 而因論其賞, 將加世祿. 公辭不受曰, 莫非王土, 何以賞爲. 固辭不得命乃曰, 與其爲一家之私恩, 曷若爲萬民之均惠. 請蠲本邑糴耗逐石五升, 以爲朝家百代之殊典. 朝廷義以許之, 遂成一邑之常制, 民到于今受其賜頌德不已書, 所謂邁種德, 德乃降黎, 民懷之者, 非公之謂也耶? 公諱沉, 字聖黙, 龜溪其號, 達城之徐也. 系出麗朝版圖判書諱晉於公爲高祖, 曾祖諱奇俊承奉郞都官佐郞, 祖諱穎重大匡達城君. 考諱均衡恭愍王庚子登第即鄭圃隱同榜也, 奉政大夫政堂文學謚貞平公, 妣光山金氏遠鳴之女. 公入我朝筮仕爲朝奉大夫典醫少監, 世宗朝以才望擢授三南均田制處使. 公早逰圃隱先生之門, 從事爲己之學講質傳習. 維日孜孜, 非甚病則輒晨起焚香讀書, 其於聖人之訓潛心玩味, 不啻如芻豢之悅口. 進學之㓛老而彌篤, 生徒之踵門, 請業者隨才施教, 多有成就焉. 配固城李氏麗朝東宮詹事乙芳之女, 判右軍隱庵伯之孫. 擧三子曰文翰廣興倉副丞, 文幹文科縣監, 文德出后於公之弟府使漝. 文翰生三男, 曰濟縣監, 渡文科學諭, 涉吏曹判書. 文幹生一男, 曰近中監察. 濟生三男, 曰孟元仲元季元. 渡生四男, 曰智元進士, 仁元文科, 勇元進士, 叔元進士訓導. 涉生四男, 曰震元進士, 坎元生員, 艮元, 兌元. 近中生五男, 曰震孫直長, 兌孫, 仲孫, 乾孫主簿, 義孫縣監. 玄孫以後, 煩不盡錄, 公之後世多名儒. 七世孫思遠正郞, 號樂齋, 私淑於退陶, 師友乎寒旅, 道德名節矝式士林. 廟享于本邑伊江書院及清安龜峯書院. 曰思選參奉, 號東皐, 思遠之從弟也, 亦以學行推重於世, 廟享于慶山玉川祠. 八世孫時立參奉, 號全歸堂, 以孝行贈佐郞, 廟享于本邑百源書院. 嗚呼! 今距公之世殆近四百年矣, 年代旣遠, 屢經兵燹, 文獻莫徴. 公之生卒年月及造道淺深, 歴官多少, 俱無以得其詳, 而惟是减糴一事, 永爲百世之民惠. 利澤之及人者深, 故感頌, 而不忘者久, 至有家尸戶祝之頌. 顯廟乙巳, 爲建龜巖書院而爼豆之. 墓在八公山中心村負艮之原, 與夫人李氏爲上下墳. 舊無表隧之石, 今始營之則一境, 士女莫不同聲齊應樂相其役, 豈不盛哉! 藐余後生, 素聞公之遺風, 而景慕者深矣. 今者公之遠孫栻來, 托以墓道之文. 余實人微德薄文辭蕪拙, 何敢承, 當辭之固, 而請益勤, 遂敢畧叙其事, 而係之以, 銘曰.
 
아! 우리 공께서 猗歟我公
맑은 기운을 타고 나서 淑氣挺生
일찍이 어진 스승을 만나 早得賢師
도를 배워서 성취하였네. 學道以成
은거하여 도를 전수하며 隱居教授
영재 육성에 심취하였고 樂深育英
포부를 잠시 펼쳤으니 蘊抱小施
남쪽지방의 균전이라네. 均田南方
고택의 지형이 소문나고 故宅名區
천혜의 성터라 하여 天塹可城
관에 바치라는 명과 함께 命納于官
보상하리라 하였건만 賞典將宣
세록을 사양하고 그 대신 世祿是辭
환곡의 세금을 덜게 하여 邑糴願蠲
혜택이 고을사람들에게 惠澤及民
천만년 미치게 하였네. 於千萬年
노래와 칭송이 가득하고 訶頌洋洋
경사가 면면히 이어져 餘慶綿綿
백세토록 제사 지내니 廟百世享
그 후손 헤아릴 수 없네. 不億麗孫
수목이 우거진 팔공산 鬱鬱公山
봉작 내려진 사당에서는 有封若堂
누구나 공경심이 일어나니 孰不起敬
옷과 신을 간직한 곳이라네. 衣履攸藏
내가 비석에 명을 새기니 我銘于石
무궁토록 전해지리라. 庸示無疆
 
연안(延安) 이의조(李宜朝)가 짓다.




이 자료는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가 2020년에 발행한< 대구지역 서원의 현황과 활용방안>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에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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