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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9) 영남(嶺南) 여러 성(城)의 함락
23/05/09 21:55:50 金 鍾國 조회 1223
 
9. 영남(嶺南) 여러 성(城)의 함락
左水使朴泓 見賊勢大 不敢出兵 棄城逃. 倭分兵陷西平浦⋅多大浦 多大僉使尹興信 力戰被殺. 左兵使李珏聞聲息 自兵營入東萊 及釜山陷 珏恇撓失措 託言欲在外掎角 出城退陣于蘇山驛. 府使宋象賢 留與同守 珏不從. 十五日 倭進迫東萊 象賢登城南門 督戰半日而城陷. 象賢堅座受刃而死. 倭人嘉其死守 棺斂之 埋於城外 立標而識之. 於是 郡懸望風奔潰.
密陽府使朴晉 自東萊奔還 欲阻鵲院隘路以禦之 賊陷梁山至鵲院 見其守兵 從山後乘高 蟻附散漫而至 守隘者望之 皆散. 晉馳還密陽 縱火焚軍器倉庫 棄城人山.
李珏奔還兵營 先出其妾 城中洶洶 軍一夜四五驚 珏乘曉亦脫身遁去 衆軍大潰.
敵分道長驅 連陷諸邑 無一人敢拒者
金海府使徐禮元 閉門城守 賊刈城外麥禾 塡壕 頃刻與城齊 因踰城. 草溪郡守李某先遁 禮元繼出 城遂陷.
巡察使金睟 初在晉州聞變 馳向東萊 至中路 聞賊兵已近 不能前 還走右道 不知所爲 但檄列邑 諭民避賊 由是道內皆空 愈不可爲矣.
龍宮縣監禹伏龍 領邑軍赴兵營 食水川路邊 有河陽軍數百 屬防禦使向上道 過其前 伏龍怒軍士不下馬 拘之責以欲叛 河陽軍出兵使公文 示之 方自辨 伏龍目其軍 圍而殺之皆盡 積屍滿野. 巡察使以功聞 伏龍爲通政 代鄭熙績爲安東府使
後河陽人孤兒寡妻 每逢使臣之來 遮馬首號寃 伏龍有時名 故無伸理者云.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박홍(朴泓)*1)은 倭敵의 형세가 대단한 것을 보고는 감히 군사를 내어 싸우지도 못하고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倭敵은 군사를 나누어 서평포(西平浦)⋅다대포(多大浦)를 함락시켰다.
이때 다대포 첨사 윤흥신(尹興信)은 적을 막아 힘써 싸우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이각(李珏)은 이 소식을 듣고 병영(兵營)으로부터 동래성(東萊城)*2)으로 들어왔는데, 부산성이 함락되자 이각은 겁을 내어 어찌할 줄 몰라하며, 말로는 성 밖에 나가 있으면서 적을 견제하려 한다고 핑계하고는 성을 나와서는 소산역(蘇山驛)으로 물러가서 진을 쳤다. 이때 동래부사(東策府使) 송상현(宋象賢)*3)은 자기와 함께 여기 머물러 성을 지키고자 말해 보았으나 이각은 그 뜻을 따르지 않았다.

4월 15일에 倭敵이 동래로 쳐들어와서 성에 육박하였다. 부사 송상현은 성의 남문으로 올라가서 군사들의 싸움을 독려하였으나 반나절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이때 송상현은 그 자리에 버티고 앉아서 적의 칼날에 맞아 죽었다. 倭敵들은 그가 죽음으로써 성을 지키는 것을 가상하게 여겨,그 시체를 관(棺)에 넣어서 성 밖에 묻고 말뚝을 세우고 그 뜻을 표지하였다. 이렇게 되자 여러 군(郡)⋅현(縣)에서는 풍문만 듣고 도망하여 무너져버렸다. 밀양부사(密陽府使) 박진(朴晉)*4)은 동래성으로부터 급히 달려 돌아오다가 작원(鵲院)의 좁은 골목을 가로막고 적을 방어하려고 하였다. 이때 적은 양산(梁山)을 함락시키고 작원에 이르러 그 길목을 지키는 우리 군사를 보고는 산 뒤로부터 높은 데를 타고서 개미떼처럼 붙어 막 흩어져 내려오니, 좁은 길목을 지키던 군사들은 이것을 바라보고 다 흩어져 버렸다. 박진은 말을 달려 밀양(密陽)으로 돌아와서 성 안에 불을 질러 군기창고(軍器倉庫)를 불태우고 성을 버 리고 산으로 들어갔다.

이각(李珏)은 급히 달아나 병영(兵營)으로 돌아와서 먼저 그 첩을 피난 보내니, 성 안의 인심이 흉흉하고 군사들도 하룻밤 사이에 너덧 차례나 놀랐다. 이각은 새벽을 타서 또한 몸을 빼어 도망하니 모든 군사는 크게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이때 적은 길을 나누어 휘몰아서 달려들어 잇달아 여러 고을들을 함락시켰으나, 한 사람도 감히 항거하는 자가 없었다.
김해부사(金海府使) 서예원(徐禮元)*5)은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고 있었는데, 적들은 성 밖의 보리를 베어서 참호를 메우니 잠깐 동안에 그 높이가 성과 가지런하게 되었고, 인하여 성을 넘어 달려 들었다. 그러자 초계군수(草溪郡守)*6) 이모(李某)가 먼저 도망하고, 서예원이 뒤를 이어 도망하니 성은 드디어 함락되고 말았다.

순찰사(巡察使) 김수(金睟)는 처음에 진주성(晉州城)*7)에 있다가 왜변(倭變)의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동래성으로 향하다가 중도에 이르러 적병이 이미 가까이 왔다는 말을 듣고,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 경상우도(慶尙右道)로 달려왔으나 어떻게 할 바를 알지 못하고, 다만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 백성들을 타일러 적을 피하라고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도내는 모두 텅 비어서 더욱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용궁현감(龍宮懸監) 우복룡(禹伏龍)은 그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병영으로 달려가다가 영천(永川)의 길가에 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다. 이때 하양(河陽) 군사 수백 명이 방어사(防禦使)에 소속되어 상도(上道)로 향하느라고 그 앞을 지나갔는데, 우복룡은 그 군사들이 말에서 내리지 않고 지나가는 것을 괘씸하게 여겨 붙잡아서 반란을 하려 한다고 책망하므로 하양군(河陽軍)이 병사(兵使)의 공문을 꺼내어 그에게 보이며 곧 스스로를 변명하려 하는데, 우복룡이 자기 군사들에게 눈짓을 하자, 그들을 둘러싸고 막 쳐 죽여서 전멸을 시키니 그 시체가 들판에 가득히 쌓였다.

그런데 순찰사 김수는 이와 같은 행동을 공이 있었다고 임금에게 알려서 우복룡은 통정대부(通政大夫)*8)가 되고, 정희적(鄭熙績)을 대신 하여 안동부사(安東府使)까지 되었다. 그 뒤에 죽은 하양 군사들의 가족인 고아(孤兒)와 과부[寡妻]들이 사신이 오는 것을 만날 때마다 그 말머리를 가로막고 원통함을 호소하였으나, 우복룡이 이때 명성이 있었으므로 아무도 그 원통한 사정을 말하여 풀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1)박홍(朴泓, 1534∼1593) : 조선조 宣祖 때의 무관. 자는 청원(淸源).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明宗 11년(1556) 무과에 급제함. 임진왜란 때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로 있다가 성을 버리고 도망하여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러 우위대장(右衛大將)이 됨. 그 이듬해에 전사했다.
*2)동래성(東萊城) : 경상남도 동남단에 위치한 지명. 지금 부산광역시에 속함.
*3)송상현(宋象賢, 1551∼1592) : 조선조 宣祖 때 문신. 의사(義士).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15세 때 보시(補試), 진사(進士)를 거쳐 宣祖 9년(1576)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正郎)⋅사재감(司宰監)⋅군자감(軍資監)의 정(正)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東萊府使)로 倭敵을 막아 싸우다가 순사함. 시호(諡號)는 충열(忠烈)이다.

*4)박진(朴晉, 1560∼1597) : 조선조 宣祖 때의 무신. 자는 명보(明甫), 시호는 의열(毅烈).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무과에 급제함. 밀양부사(密陽府使)로 있다가 임진왜란을 당하고, 경상좌도병사(慶尙左道兵使)가 되어 영천(永川)싸움에서 공을 세우고,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발명하여 倭敵을 쳐 경주성(慶州城)을 수복하였다.
*5)서예원(徐禮元, ?∼1593): 조선조 宣祖 때 사람. 임진왜란 때 김해부사(金海府使)로 있다가 도주하고, 뒤에 진주목사(晉州牧使)가 되어 倭敵을 막다가 전사하였음.
*6)군수(郡守) : 조선조 때 군(郡)의 행정을 맡아 다스리는 지방관으로 종4품 벼슬.

*7)진주성(晉州城) : 경상남도 서남단에 있는 요지.
*8)통정대부(通政大夫) : 조선조 때 관계(官階)로 정3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인 문관(文官). 종친(宗親) 및 의빈(儀賓)에게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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