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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2) 16. 이순신(李舜臣)이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에서 왜적(倭敵)을 쳐부숨.
23/10/10 14:44:33 金 鍾國 조회 491
16. 이순신(李舜臣)이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에서 왜적(倭敵)을 쳐부숨.
統制使李舜臣 破倭兵于珍島碧波亭下 殺其將馬多時.
舜臣至珍島 收拾兵船得十餘隻. 時沿海人乘船避亂者無數 聞舜臣至 莫不喜悅.
舜臣分道招呼 遠近雲集 使在軍後 以助形勢.
賊將馬多時 號善水戰 率其船二百餘艘 欲犯西海 相遇於碧波亭下. 舜臣以十二船 載大炮 乘潮至順流攻之 賊敗走 軍聲大振.
是時舜臣 已有軍八千餘人 進駐古今島 患乏糧. 作海路通行帖 令曰「三道沿海公私船無帖者 以奸細論 毋得通行.」
於是 凡避亂乘船者 皆來受帖. 舜臣以船大小差次 使納米受帖 大船三石 中船二石 小船一石. 避亂之人 盡載財穀入海 故不以納米爲難 而以通行無禁爲喜. 旬曰 得軍糧萬餘石.
又募民輸銅鐵鑄大炮 伐木造船 事事皆辦.
遠近避兵者 往依舜臣 結廬造幕 販賣爲生 島中不能容.
旣而天朝水兵都督陳璘出來 南下古今島 與舜臣合兵. 璘性暴猛 與人多忤 人多畏之. 上餞送于靑坡野.
余見璘軍人 毆辱守令無忌 以繩繫察訪李尙規頸曳之 流血滿面 令譯官勸解不得. 余謂同坐宰臣曰「可惜 李舜臣軍 又將敗矣. 與璘同在軍中 挈肘矛盾 必侵奪將權 縱暴軍士 逆之則增怒 順之則無厭 軍何由不敗?」衆曰「然.」相與嗟歎而已.
舜臣聞 璘將至 令軍人大畋漁 得鹿豕海物甚多 盛備酒醪而待之. 璘船入海 舜臣備軍儀遠迎. 旣到 大享其軍 諸將以下 無不沾醉 士卒傳相吿語曰「果良將也.」璘亦心喜.
不久 賊船犯近島 舜臣遣兵敗之 獲賊首四十級 悉以與璘爲功 璘益喜過望.
自是凡事 一咨於舜臣 出則與舜臣幷轎 不敢先行.
舜臣遂約束唐軍與己軍無間 有奪民一縷者 皆拿致捆打 無敢違令者 島中蕭然.
璘上書於上言「統制使有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蓋心服也.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왜적(倭敵)을 진도(珍島)의 벽파정(碧波亭)*1)에서 쳐부수고, 그 장수 마다시(馬多時)를 잡아죽였다.
처음에 이순신은 진도에 이르러 병선을 거두어 모아 10여 척을 얻었다. 이때 연해(沿海)지방의 백성들로서 배를 타고 피란하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이순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순신이 여러 길로 나누어 이들을 불러 모으니 먼 곳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에 그들을 군(軍)의 뒤에 있게 하여 싸움을 돕는 형세를 취하도록 만들었다. 倭敵의 장수 馬多時는 해전[水戰]을 잘한다고 이름났는데, 그는 전선[船] 2백여 척을 거느리고 서해(西海)를 침범하려 했으나 이순신이 거느린 군사와 진도의 벽파정(碧波亭) 아래에서 서로 만났다
.
이때 이순신은 12척의 배에 대포(大砲)를 싣고 조수의 흐름을 이용하여 순류(順流)에 이르러 이를 공격하니, 倭敵들은 패하여 달아나 버렸다. 이에 이순신이 거느린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에게는 이미 군사 8천여 명이 있어서 고금도(古今島)*2)에 나아가 주둔하였는데, 식량이 궁핍할 것을 근심하여 해로통행첩(海路通行帖)을 만들고 명령하기를, "3도(경상⋅전라⋅충청도)의 연해를 통행하는 공사(公私) 선박으로서 통행첩이 없는 것은 간첩선[奸細]으로 인정하고 통행할 수 없게 한다." 하였다. 이에 있어서 난을 피하여 배를 탄 사람들은 다 와서 통행첩(通行帖)을 받았다. 이순신은 그 배의 크고 작은 차이에 따라서 쌀을 바치고 통행첩을 받게 하였는데, 큰 배는 3석, 중간 배는 2석, 작은 배는 1석으로 정하였다.

이때 피란하는 사람들은 그 재물과 곡식을 다 싣고 바다로 들어오는 까닭으로 쌀 바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고 통행을 금지하는 일이 없는 것을 기뻐하였다. 그래서 10여일 동안에 군량 1만여 석을 얻었다. 이순신은 또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구리[銅]⋅쇠[鐵]를 모아 대포(大砲)를 주조하고,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서 모든 일이 다 잘 추진되었다. 이때 먼 곳 가까운 곳에서 병화[兵]를 피하는 사람들이 다 이순 신에게로 와서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막사를 만들고 장사를 하며 살아가니, 이들을 성 안에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 얼마 있다가 명(明)나라 수병도독(水兵都督) 진린(陳璘)*3)이 나와서 남쪽으로 고금도(古今島)에 내려와 이순신과 함께 군사를 합세하게 되었다. 진린은 성질이 사나와서 남과 거스르는 일이 많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였다.

임금께서는 그를 내려보낼 때 청파(靑坡)의 들판까지 나와서 전송하였다. 나는 진린의 군사가 고을의 수령(守令)을 때리고 욕하기를 꺼리지 않고, 새끼줄로 찰방(察訪) 이상규(李尙規)의 목을 매어 끌어서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통역관(通譯官)을 통하여 풀어 주도록 하라고 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는 함께 앉아 있던 재신(宰臣)들에게 일러 말하기를,"애석하게도 이순신의 군사가 또 장차 패할 것 같습니다. 진린과 함께 군중(軍中)에 있으면 행동하는 것이 억눌리고 의견이 서로 맞지 않겠으며, 그는 반드시 장수의 권한을 침탈 하고 군사들을 마음대로 학대할 것인데, 이를 거스르면 더욱 성낼 것이고, 그대로 따라주면 꺼리는 일이 없을 것이니, 이순신의 군사가 어찌 패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도 "그렇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서로 탄식할 따름이었다.

이순신은 진린이 장차 온다는 말을 듣고서 군사들로 하여금 크게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게 하였더니, 사슴⋅산돼지와 바닷고기들을 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이로써 잔치를 성대하게 준비하고 기다리며 진린의 배가 바다로 들어올 때 이순신은 군사적 위의를 갖추고 멀리까지 나와서 맞아들였다. 그리고 진린이 도착하자 그 군사를 크게 대접하니, 여러 장수 이하 모두가 흡족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사졸들은 서로 전하여 이야기하기를, "이순신은 과연 훌륭한 장수다." 하였으며, 진린도 또한 마음속으로 진정 기뻐하였다. 오래지 않아서 倭敵의 배가 가까운 성을 침범하므로, 이순신은 군사를 파견하여 이를 쳐부수고, 적의 머리 40급을 베어 모두 진린에게 주어 그의 공으로 만드니, 진린은 소망보다 후한 대접이라 더욱 기뻐하였다.

이로부터 모든 일은 일체 이순신에게 물어서 처결하였으며, 밖으로 나갈 때면 이순신과 가마[轎]를 나란히 하고 감히 먼저 가지 않았다.
이순신은 드디어 진린과 약속하여 明나라 군사와 자기 군사를 구별함이 없이 백성들의 조그만 물건이라도 빼앗는 사람이 있으면 잡아다가 매를 치게 하니, 감히 그 명령을 어기는 사람이 없어서 섬 안이 조용하였다. 진린은 임금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통제사(統制使 : 李舜臣)는 경천위지지재(經天緯地之才)*4)와 보천욕일지공(補天浴曰之功)*5)이 있습니다." 하였다. 이는 대개 마음으로 감복한 까닭이었다.

*1)벽파정(碧波亭) : 전라남도 진도(珍島)에 있는 지명.
*2)고금도(古今島) : 전라남도 장흥반도(長興半島)와 해남반도(海南半島) 사이에 있는 섬.
*3)진린(陳璘) : 명(明)나라 신종(神宗) 때 무장. 世宗 때 지휘첨사(指揮僉使)가 되었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수병도독(水兵都督)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와서 이순신(李舜臣)과 더불어 倭敵을 치는 데 큰 공을 세움.

*4)경천위지지재(經天緯地之才) : 천하를 경륜할 만한 뛰어난 인재라는 뜻.
*5)보천욕일지공(補天浴曰之功) : 국난을 극복하여 국운을 만회한 큰 공로라는 뜻. 고사에 여와女媧가 오색 돌로 하늘 뚫린 데를 깁고, 의화義和가 해 열 개를 낳아 감천甘泉에 목욕시켰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 여와씨 女媧氏 ; 중국 상고시대 임금의 이름. 복희씨伏義氏의 누이. 오색五色의 돌을 반죽해서 하늘을 깁고 큰 거북의 발을 잘라서 사극四極을 세웠다고 함. 여희 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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