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향교 자문위원 金 鍾國
3.옥저(沃沮)
東沃沮는 高句麗의 蓋馬大山 동쪽, 큰 바다 가까이 위치해 있다. 그곳의 지형은 동북으로 좁고 서남으로는 길어서 약 1천여 리나 된다. 북으로 挹婁, 扶餘와 접해있고, 남으로는 濊貊과 접해있다. 인구는 5천호이며, 大君王 이 없으며, 부락마다 대대로 각각 제일 어른인 首領이 있다. 언어는 고구려와 대체로 같거나 때로는 조금씩 다른 경우도 있다. (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扶餘 南與濊貊接 戶五千 無大君王 世世邑落各有長帥 其言語句麗大同 時時小異)
漢나라 초기에 燕에서 도망쳐온 漢人 衛滿이 조선의 왕이 되었는데, 이 때 沃沮도 그에 예속되었다. 漢武帝 元封(기원전 110~105년) 2년에 군대를 보내어 朝鮮을 쳐서 위만의 손자 右渠를 죽인 후 그 땅을 나누어 4개의 郡으로 삼았는데, 沃沮城은 玄菟郡의 治所가 되었다. 후에 와서 夷貊들의 침략을 받게 되자 玄菟郡의 治所를 高句麗의 서북쪽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소위 옛터가 바로 그곳이다. (玄菟郡이 옮겨간 후) 옥저는 다시 낙랑군에 예속되었다.(漢初 燕亡人衛滿王朝鮮 時沃沮皆屬焉 漢武帝元封二年 伐朝鮮 殺滿孫右渠 分其地爲四郡 以沃沮城爲玄菟郡 後爲夷貊所侵 徙郡高句麗西北 今所謂玄菟故府是也 沃沮還屬樂浪)
한나라는 그 땅이 넓고 멀다고 하여 單單大嶺(지금의 백두산) 동쪽에 東部都尉를 설치하고 不耐城에 그 治所를 두고 東部의 일곱 縣을 별도로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때 沃沮 전 지역도 이 일곱 縣 중의 하나가 되었다.
漢光武帝 建武(기원25~56년) 6년(기원30년)에 변경의 郡들을 줄일 때 이곳의 東部都尉도 폐지되었다. 그 후에 각 현의 수령들을 縣侯로 봉하였는데, 不耐‧華麗‧沃沮 등의 縣들도 모두 侯國이 되었다. 그러자 東夷들이 다시 서로 攻伐하기 시작하였으나, 오직 不耐縣의 濊侯 만은 지금까지도 漢나라의 관직을 그대로 두고 그 자리를 모두 濊사람들로 하여금 맡게 했다. (漢以土地廣遠 在單單大嶺之東 分置東部都尉 治不耐城 別主領東七縣 時沃沮亦皆爲縣漢光建武六年 省邊郡 都尉由此罷 其後皆以其縣中渠帥爲縣侯 不耐‧華麗‧沃沮諸縣皆爲侯國 東夷更相攻伐 唯不耐濊侯至今猶置功曹 主簿諸曹 開濊民作之)
옥저의 여러 부락 수령들은 모두 자신들을 三老라 부르는데, 이는 곧 과거 漢나라의 縣으로 있었을 때 각 부락이 수령들에 대한 명칭이다. 나라가 작고 또 큰 나라들 사이에 끼어 있었음으로 마침내 高句麗에게 신하의 지위로 예속되었다. 高句麗는 다시 그들 중에서 使者를 뽑아 서로 다스리도록 하고, 또 고구려의 大加를 보내어 그들의 租稅를 통일적으로 거두게 하였다. 조세의 징수 대상에는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베(貊布)와 고기와 소금 및 해산물 등이 포함되었다. 沃沮 사람들은 그것을 짊어지고 1천 리나 되는 먼길을 가서 바쳐야 하였다. 이 밖에 또 미녀를 뽑아 보내어 고구려의 귀족들의 婢妾으로 삼게 하였는데, 고구려의 귀족들은 그들을 종이나 하인(奴僕)처럼 대우하였다. (沃沮諸邑落渠帥 皆自稱三老 則故縣國之制也 國小 迫于大國之間 遂臣屬句麗 句麗復置其中人爲使者 使相主領 又使大加統責其租稅 貊布‧魚‧鹽‧海中食物 千里擔負致之 又送其美女以爲婢妾 遇之如奴僕)
옥저는 토지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의 생산에 알맞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농사를 잘 지었다. 사람들의 성격은 질박하고 정직하고 강인하고 용감하며, 소와 말이 적어서 기병전에는 미숙하나 긴 창을 들고 걸어가며 싸우는 步兵戰에는 능숙하다. 음식과 집, 의복과 예절, 등은 고구려와 비슷하다. (其土地肥美 背山向海 宜五穀 善田種 人性質直彊勇 少牛馬 便持矛步戰 飮食居處 衣服禮例節 有似句麗)
(*원주:(一) <위략>에서 말하기를 옥저의 결혼 풍속은 여자의 나이가 열 살이 되면 남자 쪽 집안과 서로 혼약을 맺은 후 사위가 될 남자 쪽 집에서 여자를 맞아들여 키운 다음 아내로 삼는데, 성인이 되면 일단 다시 여자 집으로 돌려보낸다. 여자 쪽 집에서 돈을 요구하면 그 돈을 모두 건네준 후에야 비로소 다시 사위에게 돌려보낸다.
(*原註:(一) 魏略曰 其嫁娶之法 女年十歲 已相設許 壻家迎之 長養以爲婦 至成人 更還女家 女家貢錢 錢畢 乃復還壻)
장례 풍속은 매장할 때에는 나무로 된 큰 겉 널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丈으로, 머리 쪽 함 부분을 열어두어 문으로 삼는다. 갓 죽은 자는 임시매장을 하는데, 얇게 흙을 덮어서 겨우 형체만 가려 두었다가 살이 모두 썩어 없어지면 그때 가서 뼈만 추려서 관에 담아 둔다. 온 집안사람이 모두가 하나의 널을 공동으로 사용한다. 나무로 죽은 사람의 생전 모습을 조각해 두는데, 그 조각 인형의 숫자는 널 속에 담겨있는 죽은 사람의 숫자와 같다. 또 발이 셋 달린 옹기솥에 쌀을 담아서 널리 문 옆에 매달아 둔다. (其葬作大木槨 長十餘丈 開一頭作戶 新死者皆埋之 才使覆形 皮肉盡 乃取骨槨中 擧家皆共一槨 刻木如生形 隨死者爲數 又有瓦鎘(력) 置米其中 編(縣)懸之於槨戶邊)
북옥저는 일명 置溝婁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에서 8백 여리 떨어져 있다. 그 風俗은 남쪽 옥저와 모두 같다. 그리고 挹婁와 접해있다. 읍루사람들은 배를 타고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 사람들은 이를 겁내어 여름이면 항상 산의 깊은 바위굴에 숨어 지내다가 겨울에 얼음이 얼어 읍루의 배들이 다닐 수 없으면 그때서야 내려와서 마을에서 지낸다.(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挹婁接 挹婁喜乘船寇鈔 北沃沮畏之 夏月恒在山巖深穴中爲守備 冬月冰凍 船道不通 乃下居村落)
현토군 태수 왕기가 따로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왕 위궁을 추격하게 하여 옥저의 동쪽 끝까지, 해변까지 갔다.(王頎別遣追討宮 盡其東界)
*(이하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저자 申采浩 선생이 말했듯이, 중국의 침략이 멀리까지 미쳤음을 과장하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이다.)
(*(병사들이) 그 지방 노인들에게 물었다. ⌜바다의 동쪽에도 사람이 사는가?⌟노인들이 대답하였다. ⌜옥저 사람이 일찍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고 있다가 풍랑을 만나 수십 일간 표류하여 동쪽의 한 섬에 닿았는데, 그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으나 우리와는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그곳의 풍속은 항상 7월이면 여자아이를 뽑아서 바다에 던진다.⌟ 또 말했다.⌜베옷 한 벌이 바다로부터 떠내려 왔는데 그 옷 모양이 중국인들의 옷 같았으며, 양 소매의 길이는 3丈⌟이나 되었다. 또 남파선 한 척이 파도에 밀려와서 해변가에 닿았기에 배 안을 뒤져 보았더니 배 안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목에 또 얼굴이 하나 있었다. 그를 산채로 붙잡았으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음식을 먹지 않아서 얼마 후에 죽었다. 이상에서 말한 일들이 일어난 지역은 모두 옥저의 동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問其耆老⌜海東復有人不⌟ 耆老言國人常乘船捕魚 遭風見吹數十日 東得一島 上有人 言語不相曉 其俗常以七月取童女沈海 又言有一國亦在海中 純女無男 又說得一布衣 從海中浮出 其身如中人衣 其兩袖長三丈 又得一破船 隨波出在海岸邊 有一人項中復有面 生得之 與語不相通 不食而死 其域皆在沃沮東大海中*)
4.읍루(挹婁)
읍루는 부여의 동북으로 1천여 리 떨어진 거리에 있고, 큰 바다에 연해 있고, 남쪽은 北沃沮와 접하고 그 북쪽 끝은 어디까지 이르는지 알 수 없다.
읍루의 지형은 높고 험준한 산들이 많다. 사람들의 외모는 부여 사람들과 비슷하나 그 언어는 부여‧고구려와 같지 않다. 오곡과 소‧말‧마포가 산출된다. 사람들은 용감하고 힘이 세다. 읍루 전체를 다스리는 大君長은 없고 각 촌락마다 수령(大人)들이 있다. (挹婁在扶餘東北千餘里 濱大海 南與北沃沮接 未知其北所極 其土地多山險 其人形似扶餘 言語不與扶餘‧高句麗同 有五穀‧牛‧馬‧麻布 人多勇力 無大君長 邑落各有大人)
(*역자 주:단재 신채호는 부여에서 동북으로 천 여리 있는 것은 挹婁가 아니라 <러신>국이라 하였다.)
읍루사람들은 산림 가운데 있는 굴속에서 생활한다. 큰 집은 땅속에 깊이판 굴로서 그 굴의 깊이가 아홉 계단이나 된다. 계단이 많을수록 더 좋은 집이라 여긴다. 땅의 기운은 부여보다 훨씬 한랭하다. 읍루의 풍속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돼지고기를 먹고, 돼지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다. 겨울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무려 몇 푼이나 될 정도로 두텁게 발라서 찬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에는 벌거벗은 채 지내는데, 다만 한 자 남짓되는 천으로 몸의 아랫도리만 가린다. 사람들의 위생은 불결하다. 돼지우리를 집안 가운데 만들어 두고 그 돼지우리를 둘러싸고 거처한다. (處山林之間 常穴居 大家深九梯 多以爲好 土氣寒 劇於扶餘 其俗好養猪 食其肉 衣其皮 冬以猪膏塗身 厚數分 以禦風寒 夏則裸袒 以尺布隱其前後 以蔽形體 其人不潔 作溷(혼)在中央 人圍其表居)
읍루에서 나는 활은 길이가 4자(尺)로 그 힘은 쇠뇌와 같고, 화살은 호목(楛木)으로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옛 肅愼國의 활이다. 사람들은 활을 쏘는데 활을 쏘는 사람들은 눈을 쏘아 맞힌다. 화살에는 독이 발려져 있어서 맞는 사람은 모두 죽는다. 이곳에서는 붉은 옥(赤玉)과 좋은 담비(貂)가 산출되는데, 지금 말하는 읍루의 담비(挹婁貂)란 바로 이것을 말한다. (其弓長四尺 力如弩 矢用楛(호) 長尺八寸 靑石爲鏃(족) 古之肅愼之國也 善射 射人皆入目 矢施毒 人中皆死 出赤玉․好貂 今所謂挹婁貂是也)
漢 이래 읍루는 계속 부여에 신하로서 예속되었는데, 부여가 조세와 무역을 과중하게 요구하였음으로 魏 文帝 黃初 연간(기원 220~226년)에 부여에 반기를 들었다. 부여가 그들은 수차례 그들을 정벌하였으나, 비록 읍루의 인구는 적었으나, 험준한 산에 자리하고 있었고 또 이웃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활과 화살을 두려워하여 하기 때문에, 부여는 결국 그들을 항복시킬 수가 없었다. 읍루사람들은 배를 타고 노략질을 잘하였기 때문에 苦痛을 당한다. 東夷族들은 음식을 먹을 때 대부분 조(俎)와 두(豆)와 같은 식기류를 사용하는데, 다만 읍루 사람들만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의 법도와 풍속은 동이족들 중에서 가장 기강이 없다. (自漢其末 臣屬扶餘 扶餘責其租賦重 以黃初中叛之 扶餘數伐之 其人衆雖少 所在山險 隣國人畏其弓矢 卒不能服也 其國便乘船寇盜 隣國患之 東夷飮食類皆俎豆 唯挹婁不 法俗最無綱紀也)
(*1.역자 주:신채호는 <삼국지>동이열전 교정에서, <음식을 먹을 때 조두를 사용하지 않고 법도와 풍습이 동이족 중에서 가징 기강이 없는 것>은 읍루가 아니라 ⌜러신⌟국이라 했다.
(*2.역자 주:읍루와 예맥은 본래 같은 ⌜러신⌟국의 이름인데 이를 별개로 보고 각각 따로 列傳을 둔 것은 <삼국지>저자(陳壽)의 착오라고 申采浩는 <삼국지>동이열전 교정에서 밝혔다.)
5.예(濊)
濊는 남으로 진한과 접하고, 북으로 高句麗․옥저와 접하고, 동쪽에는 큰 바다가 있는데, 지금 朝鮮의 以東은 모두 예에 땅이다. 인구는 2만호이다.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戶二萬)
(*역자 주:단재 신채호는 남으로 진한과 접하고 북으로 고구려와 옥저와 접하고 있었던 것은 동부여라 하였다.)
옛날 殷이 망하자 箕子가 조선으로 건너가서 여덟 조항의 규범으로 백성을 가르쳐서, 그곳 백성들은 문을 잠그는 일이 없었고 도적질을 하지 않았다. 그 뒤 40여 代 후에 朝鮮侯 箕準이 왕을 참칭하였다. 陳勝 등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자 천하가 秦에 반기를 들었다. 이때 燕․齊․趙 백성들 중에 수만 명이 난을 피하여 朝鮮으로 갔다. 燕나라 사람 衛滿이 상투를 틀고 東夷族의 옷을 입고 이곳으로 와서 왕이 되었다.(昔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以敎之 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侯準僭號稱王 陳勝等起 天下叛秦 燕․齊․趙民避之朝鮮數萬口 燕人衛滿 魋(퇴)結以服 復來王之)
(*역자 주:陳勝(기원전?~208년):가난한 농민출신으로 秦2세 원년(기원전209년)에 북방 변경 수비군으로 징발되어 가던 중 점현(蔪縣:지금의 안휘성 宿縣 東南의 劉村集)에서 吳廣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 세력이 급격히 커져서 陳縣(:지금의 하남성 회양현)에 張楚 정권을 세우고 왕으로 추대되었다. 후에 싸움에 패하여 성보(成父)로 물러났을 때 피살되었다.)
漢 武帝가 조선을 쳐서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네 개의 군으로 만들었다. 그 후부터 그곳 사람들과 漢나라 사람들은 점차 분리되었다.
濊에는 전체를 다스리는 大君長은 없고, 漢나라가 건립된 이래 그곳의 관직으로 侯邑君과 三老가 있어서 백성들을 통솔하고 관장하였다. 그곳 노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옛날에는 자신들과 고구려는 같은 종족이라고 하였다.
그곳 사람들은 성격이 신중하고 성실하며, 욕심이 적고, 염치가 있어서 남에게 청하거나 비는 일이 없다. 언어와 법, 풍속은 대략 고구려와 같으나 다만 의복은 다르다. 남녀 모두 옷깃이 둥근 옷을 입으며, 남자는 장식으로 넓이가 여러 치(寸) 되는 은으로 만든 꽃을 단다. (漢武帝伐朝鮮 分其地爲四郡 自是之後 胡․漢稍別 無大君長 自漢已來 其官有侯邑郡․三老 統主下戶 耆老老舊自謂與句麗同族 其性愿慤원각 少嗜慾 有廉恥 不請句麗匃 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 衣服有異 男女衣皆著曲領 男子繫銀花廣數寸以爲飾)
單單大嶺에서 以西는 낙랑에 속하고 以東의 7개 縣은 東部都尉가 관리하는데, 그 백성들은 모두 濊사람들이다. 후에 동부도위란 관직을 없애고 그들의 수령을 侯로 봉하였다. 지금의 不耐濊侯는 그 종족이다. 漢말기에는 다시 고구려에 귀속되었다.(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 自領以東七縣 都尉主之 皆以濊爲民 後省都尉 封其渠帥爲侯 今不耐濊皆其種也 漢末更屬句麗)
그곳의 풍속은 산천을 중시한다. 산천에는 경계가 있어서 다른 부락 소유의 산천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한다. 同姓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 꺼리고 피하는 것이 많은데, 질병으로 사망하는 자가 있으면 그가 살던 집을 버리고 새로 집을 짓는다. 麻布가 생산되며, 누에를 쳐서 솜옷을 만든다. 새벽에 별자리를 관찰하여 한 해의 풍년과 흉년을 미리 안다. 珠玉은 보물로 여기지 않는다. 항상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때는 밤낮으로 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는데 이 행사를 ‘舞天’이라고 한다. 또 호랑이를 신으로 섬기면서 제사를 지낸다.(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分 不得妄相涉入 同姓不婚 多忌諱 疾病死亡輒損其舊宅 更作新居 有麻布 蠶桑作緜 曉候星宿 豫知年歲豊作約 不以珠玉爲寶 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祭虎以爲神)
부락 간에 서로 침범하는 일이 생기면 그 벌로 살아있는 소와 말을 바치게 하는데, 이를 責禍라고 한다. 사람을 죽이는 자는 그 벌로 사형에 처한다. 盜賊이 적다. 길이가 세 길이나 되는 긴 창을 때로는 여럿이 이것을 함께 사용하기도 한다. 步兵戰에 능숙하다. 낙랑군의 檀弓은 바로 이곳에서 산출된다. 바다에는 무늬 있는 물고기 가죽이 산출되고, 뭍에서는 무늬 있는 표범 가죽이 많이 산출된다. 또 果下馬라는 왜소한 말이 산출되는데, 漢나라 桓帝 때에는 이것을 중국에 조공으로 바친 적도 있다.(其邑落相侵犯 輒相罰責生牛馬 名之爲責禍 殺人者償死 少寇盜 作矛長三丈 或數人共持之 能步戰 樂浪檀弓出其地 其海出班魚皮 土地饒文豹 又出果下馬 漢桓時獻之)
(*原註: (一)臣松之按:果下馬高三尺 乘之可于果樹下行 故謂之果下 見博物志‧魏都賦): 신 裴松之가 생각하기에 과하마는 그 높이가 약 90cm로, 이것을 타고 과일나무 아래를 지나갈 수 있기 때문에 과하라고 부른 것 같다. 博物志와 魏都賦에 이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魏 帝王의 正始(기원204~249년) 6년(기원245년)에 단단대령 以東의 濊가 고구려에 예속된 것을 이유로 낙랑태수 劉茂와 대방태수 弓遵이 군사를 일으켜 濊를 치니 예의 수령인 不耐侯 등이 城邑을 들어 투항하였다. 正始 8년(247년)에 그들이 찾아와서 조공을 바치므로, 황제는 다시 조서를 내려서 그들의 수령을 不耐濊王에 봉하였다. 이때부터 예왕은 민간에 섞여 거처하면서, 계절마다 郡정부로 찾아와 인사하였다. 낙랑과 대방 두 군에서 군사상 필요에서 인원 징집이나 물자 증발을 하게 될 때에는 濊國 사람들에게도 부담시켰는데, 그들에 대한 대우는 관내의 일반 중국 백성들과 똑 같이하였다. (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 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擧邑降 其八年 詣闕朝貢 詣貢拜不耐濊王 居處雜在民間 四時濊濊郡朝謁 二郡有軍征賦調 供給役使 遇之如民)
참고도서: 朝鮮上古文化史(丹齋 申采浩) 부록 三國志 魏書 東夷傳(박기봉), 처음 읽는 扶餘史(송호정),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이덕일, 김병기)
3.옥저(沃沮)
東沃沮는 高句麗의 蓋馬大山 동쪽, 큰 바다 가까이 위치해 있다. 그곳의 지형은 동북으로 좁고 서남으로는 길어서 약 1천여 리나 된다. 북으로 挹婁, 扶餘와 접해있고, 남으로는 濊貊과 접해있다. 인구는 5천호이며, 大君王 이 없으며, 부락마다 대대로 각각 제일 어른인 首領이 있다. 언어는 고구려와 대체로 같거나 때로는 조금씩 다른 경우도 있다. (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扶餘 南與濊貊接 戶五千 無大君王 世世邑落各有長帥 其言語句麗大同 時時小異)
漢나라 초기에 燕에서 도망쳐온 漢人 衛滿이 조선의 왕이 되었는데, 이 때 沃沮도 그에 예속되었다. 漢武帝 元封(기원전 110~105년) 2년에 군대를 보내어 朝鮮을 쳐서 위만의 손자 右渠를 죽인 후 그 땅을 나누어 4개의 郡으로 삼았는데, 沃沮城은 玄菟郡의 治所가 되었다. 후에 와서 夷貊들의 침략을 받게 되자 玄菟郡의 治所를 高句麗의 서북쪽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소위 옛터가 바로 그곳이다. (玄菟郡이 옮겨간 후) 옥저는 다시 낙랑군에 예속되었다.(漢初 燕亡人衛滿王朝鮮 時沃沮皆屬焉 漢武帝元封二年 伐朝鮮 殺滿孫右渠 分其地爲四郡 以沃沮城爲玄菟郡 後爲夷貊所侵 徙郡高句麗西北 今所謂玄菟故府是也 沃沮還屬樂浪)
한나라는 그 땅이 넓고 멀다고 하여 單單大嶺(지금의 백두산) 동쪽에 東部都尉를 설치하고 不耐城에 그 治所를 두고 東部의 일곱 縣을 별도로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때 沃沮 전 지역도 이 일곱 縣 중의 하나가 되었다.
漢光武帝 建武(기원25~56년) 6년(기원30년)에 변경의 郡들을 줄일 때 이곳의 東部都尉도 폐지되었다. 그 후에 각 현의 수령들을 縣侯로 봉하였는데, 不耐‧華麗‧沃沮 등의 縣들도 모두 侯國이 되었다. 그러자 東夷들이 다시 서로 攻伐하기 시작하였으나, 오직 不耐縣의 濊侯 만은 지금까지도 漢나라의 관직을 그대로 두고 그 자리를 모두 濊사람들로 하여금 맡게 했다. (漢以土地廣遠 在單單大嶺之東 分置東部都尉 治不耐城 別主領東七縣 時沃沮亦皆爲縣漢光建武六年 省邊郡 都尉由此罷 其後皆以其縣中渠帥爲縣侯 不耐‧華麗‧沃沮諸縣皆爲侯國 東夷更相攻伐 唯不耐濊侯至今猶置功曹 主簿諸曹 開濊民作之)
옥저의 여러 부락 수령들은 모두 자신들을 三老라 부르는데, 이는 곧 과거 漢나라의 縣으로 있었을 때 각 부락이 수령들에 대한 명칭이다. 나라가 작고 또 큰 나라들 사이에 끼어 있었음으로 마침내 高句麗에게 신하의 지위로 예속되었다. 高句麗는 다시 그들 중에서 使者를 뽑아 서로 다스리도록 하고, 또 고구려의 大加를 보내어 그들의 租稅를 통일적으로 거두게 하였다. 조세의 징수 대상에는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베(貊布)와 고기와 소금 및 해산물 등이 포함되었다. 沃沮 사람들은 그것을 짊어지고 1천 리나 되는 먼길을 가서 바쳐야 하였다. 이 밖에 또 미녀를 뽑아 보내어 고구려의 귀족들의 婢妾으로 삼게 하였는데, 고구려의 귀족들은 그들을 종이나 하인(奴僕)처럼 대우하였다. (沃沮諸邑落渠帥 皆自稱三老 則故縣國之制也 國小 迫于大國之間 遂臣屬句麗 句麗復置其中人爲使者 使相主領 又使大加統責其租稅 貊布‧魚‧鹽‧海中食物 千里擔負致之 又送其美女以爲婢妾 遇之如奴僕)
옥저는 토지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의 생산에 알맞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농사를 잘 지었다. 사람들의 성격은 질박하고 정직하고 강인하고 용감하며, 소와 말이 적어서 기병전에는 미숙하나 긴 창을 들고 걸어가며 싸우는 步兵戰에는 능숙하다. 음식과 집, 의복과 예절, 등은 고구려와 비슷하다. (其土地肥美 背山向海 宜五穀 善田種 人性質直彊勇 少牛馬 便持矛步戰 飮食居處 衣服禮例節 有似句麗)
(*원주:(一) <위략>에서 말하기를 옥저의 결혼 풍속은 여자의 나이가 열 살이 되면 남자 쪽 집안과 서로 혼약을 맺은 후 사위가 될 남자 쪽 집에서 여자를 맞아들여 키운 다음 아내로 삼는데, 성인이 되면 일단 다시 여자 집으로 돌려보낸다. 여자 쪽 집에서 돈을 요구하면 그 돈을 모두 건네준 후에야 비로소 다시 사위에게 돌려보낸다.
(*原註:(一) 魏略曰 其嫁娶之法 女年十歲 已相設許 壻家迎之 長養以爲婦 至成人 更還女家 女家貢錢 錢畢 乃復還壻)
장례 풍속은 매장할 때에는 나무로 된 큰 겉 널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丈으로, 머리 쪽 함 부분을 열어두어 문으로 삼는다. 갓 죽은 자는 임시매장을 하는데, 얇게 흙을 덮어서 겨우 형체만 가려 두었다가 살이 모두 썩어 없어지면 그때 가서 뼈만 추려서 관에 담아 둔다. 온 집안사람이 모두가 하나의 널을 공동으로 사용한다. 나무로 죽은 사람의 생전 모습을 조각해 두는데, 그 조각 인형의 숫자는 널 속에 담겨있는 죽은 사람의 숫자와 같다. 또 발이 셋 달린 옹기솥에 쌀을 담아서 널리 문 옆에 매달아 둔다. (其葬作大木槨 長十餘丈 開一頭作戶 新死者皆埋之 才使覆形 皮肉盡 乃取骨槨中 擧家皆共一槨 刻木如生形 隨死者爲數 又有瓦鎘(력) 置米其中 編(縣)懸之於槨戶邊)
북옥저는 일명 置溝婁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에서 8백 여리 떨어져 있다. 그 風俗은 남쪽 옥저와 모두 같다. 그리고 挹婁와 접해있다. 읍루사람들은 배를 타고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 사람들은 이를 겁내어 여름이면 항상 산의 깊은 바위굴에 숨어 지내다가 겨울에 얼음이 얼어 읍루의 배들이 다닐 수 없으면 그때서야 내려와서 마을에서 지낸다.(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挹婁接 挹婁喜乘船寇鈔 北沃沮畏之 夏月恒在山巖深穴中爲守備 冬月冰凍 船道不通 乃下居村落)
현토군 태수 왕기가 따로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왕 위궁을 추격하게 하여 옥저의 동쪽 끝까지, 해변까지 갔다.(王頎別遣追討宮 盡其東界)
*(이하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저자 申采浩 선생이 말했듯이, 중국의 침략이 멀리까지 미쳤음을 과장하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이다.)
(*(병사들이) 그 지방 노인들에게 물었다. ⌜바다의 동쪽에도 사람이 사는가?⌟노인들이 대답하였다. ⌜옥저 사람이 일찍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고 있다가 풍랑을 만나 수십 일간 표류하여 동쪽의 한 섬에 닿았는데, 그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으나 우리와는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그곳의 풍속은 항상 7월이면 여자아이를 뽑아서 바다에 던진다.⌟ 또 말했다.⌜베옷 한 벌이 바다로부터 떠내려 왔는데 그 옷 모양이 중국인들의 옷 같았으며, 양 소매의 길이는 3丈⌟이나 되었다. 또 남파선 한 척이 파도에 밀려와서 해변가에 닿았기에 배 안을 뒤져 보았더니 배 안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목에 또 얼굴이 하나 있었다. 그를 산채로 붙잡았으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음식을 먹지 않아서 얼마 후에 죽었다. 이상에서 말한 일들이 일어난 지역은 모두 옥저의 동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問其耆老⌜海東復有人不⌟ 耆老言國人常乘船捕魚 遭風見吹數十日 東得一島 上有人 言語不相曉 其俗常以七月取童女沈海 又言有一國亦在海中 純女無男 又說得一布衣 從海中浮出 其身如中人衣 其兩袖長三丈 又得一破船 隨波出在海岸邊 有一人項中復有面 生得之 與語不相通 不食而死 其域皆在沃沮東大海中*)
4.읍루(挹婁)
읍루는 부여의 동북으로 1천여 리 떨어진 거리에 있고, 큰 바다에 연해 있고, 남쪽은 北沃沮와 접하고 그 북쪽 끝은 어디까지 이르는지 알 수 없다.
읍루의 지형은 높고 험준한 산들이 많다. 사람들의 외모는 부여 사람들과 비슷하나 그 언어는 부여‧고구려와 같지 않다. 오곡과 소‧말‧마포가 산출된다. 사람들은 용감하고 힘이 세다. 읍루 전체를 다스리는 大君長은 없고 각 촌락마다 수령(大人)들이 있다. (挹婁在扶餘東北千餘里 濱大海 南與北沃沮接 未知其北所極 其土地多山險 其人形似扶餘 言語不與扶餘‧高句麗同 有五穀‧牛‧馬‧麻布 人多勇力 無大君長 邑落各有大人)
(*역자 주:단재 신채호는 부여에서 동북으로 천 여리 있는 것은 挹婁가 아니라 <러신>국이라 하였다.)
읍루사람들은 산림 가운데 있는 굴속에서 생활한다. 큰 집은 땅속에 깊이판 굴로서 그 굴의 깊이가 아홉 계단이나 된다. 계단이 많을수록 더 좋은 집이라 여긴다. 땅의 기운은 부여보다 훨씬 한랭하다. 읍루의 풍속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돼지고기를 먹고, 돼지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다. 겨울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무려 몇 푼이나 될 정도로 두텁게 발라서 찬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에는 벌거벗은 채 지내는데, 다만 한 자 남짓되는 천으로 몸의 아랫도리만 가린다. 사람들의 위생은 불결하다. 돼지우리를 집안 가운데 만들어 두고 그 돼지우리를 둘러싸고 거처한다. (處山林之間 常穴居 大家深九梯 多以爲好 土氣寒 劇於扶餘 其俗好養猪 食其肉 衣其皮 冬以猪膏塗身 厚數分 以禦風寒 夏則裸袒 以尺布隱其前後 以蔽形體 其人不潔 作溷(혼)在中央 人圍其表居)
읍루에서 나는 활은 길이가 4자(尺)로 그 힘은 쇠뇌와 같고, 화살은 호목(楛木)으로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옛 肅愼國의 활이다. 사람들은 활을 쏘는데 활을 쏘는 사람들은 눈을 쏘아 맞힌다. 화살에는 독이 발려져 있어서 맞는 사람은 모두 죽는다. 이곳에서는 붉은 옥(赤玉)과 좋은 담비(貂)가 산출되는데, 지금 말하는 읍루의 담비(挹婁貂)란 바로 이것을 말한다. (其弓長四尺 力如弩 矢用楛(호) 長尺八寸 靑石爲鏃(족) 古之肅愼之國也 善射 射人皆入目 矢施毒 人中皆死 出赤玉․好貂 今所謂挹婁貂是也)
漢 이래 읍루는 계속 부여에 신하로서 예속되었는데, 부여가 조세와 무역을 과중하게 요구하였음으로 魏 文帝 黃初 연간(기원 220~226년)에 부여에 반기를 들었다. 부여가 그들은 수차례 그들을 정벌하였으나, 비록 읍루의 인구는 적었으나, 험준한 산에 자리하고 있었고 또 이웃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활과 화살을 두려워하여 하기 때문에, 부여는 결국 그들을 항복시킬 수가 없었다. 읍루사람들은 배를 타고 노략질을 잘하였기 때문에 苦痛을 당한다. 東夷族들은 음식을 먹을 때 대부분 조(俎)와 두(豆)와 같은 식기류를 사용하는데, 다만 읍루 사람들만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의 법도와 풍속은 동이족들 중에서 가장 기강이 없다. (自漢其末 臣屬扶餘 扶餘責其租賦重 以黃初中叛之 扶餘數伐之 其人衆雖少 所在山險 隣國人畏其弓矢 卒不能服也 其國便乘船寇盜 隣國患之 東夷飮食類皆俎豆 唯挹婁不 法俗最無綱紀也)
(*1.역자 주:신채호는 <삼국지>동이열전 교정에서, <음식을 먹을 때 조두를 사용하지 않고 법도와 풍습이 동이족 중에서 가징 기강이 없는 것>은 읍루가 아니라 ⌜러신⌟국이라 했다.
(*2.역자 주:읍루와 예맥은 본래 같은 ⌜러신⌟국의 이름인데 이를 별개로 보고 각각 따로 列傳을 둔 것은 <삼국지>저자(陳壽)의 착오라고 申采浩는 <삼국지>동이열전 교정에서 밝혔다.)
5.예(濊)
濊는 남으로 진한과 접하고, 북으로 高句麗․옥저와 접하고, 동쪽에는 큰 바다가 있는데, 지금 朝鮮의 以東은 모두 예에 땅이다. 인구는 2만호이다.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戶二萬)
(*역자 주:단재 신채호는 남으로 진한과 접하고 북으로 고구려와 옥저와 접하고 있었던 것은 동부여라 하였다.)
옛날 殷이 망하자 箕子가 조선으로 건너가서 여덟 조항의 규범으로 백성을 가르쳐서, 그곳 백성들은 문을 잠그는 일이 없었고 도적질을 하지 않았다. 그 뒤 40여 代 후에 朝鮮侯 箕準이 왕을 참칭하였다. 陳勝 등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자 천하가 秦에 반기를 들었다. 이때 燕․齊․趙 백성들 중에 수만 명이 난을 피하여 朝鮮으로 갔다. 燕나라 사람 衛滿이 상투를 틀고 東夷族의 옷을 입고 이곳으로 와서 왕이 되었다.(昔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以敎之 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侯準僭號稱王 陳勝等起 天下叛秦 燕․齊․趙民避之朝鮮數萬口 燕人衛滿 魋(퇴)結以服 復來王之)
(*역자 주:陳勝(기원전?~208년):가난한 농민출신으로 秦2세 원년(기원전209년)에 북방 변경 수비군으로 징발되어 가던 중 점현(蔪縣:지금의 안휘성 宿縣 東南의 劉村集)에서 吳廣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 세력이 급격히 커져서 陳縣(:지금의 하남성 회양현)에 張楚 정권을 세우고 왕으로 추대되었다. 후에 싸움에 패하여 성보(成父)로 물러났을 때 피살되었다.)
漢 武帝가 조선을 쳐서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네 개의 군으로 만들었다. 그 후부터 그곳 사람들과 漢나라 사람들은 점차 분리되었다.
濊에는 전체를 다스리는 大君長은 없고, 漢나라가 건립된 이래 그곳의 관직으로 侯邑君과 三老가 있어서 백성들을 통솔하고 관장하였다. 그곳 노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옛날에는 자신들과 고구려는 같은 종족이라고 하였다.
그곳 사람들은 성격이 신중하고 성실하며, 욕심이 적고, 염치가 있어서 남에게 청하거나 비는 일이 없다. 언어와 법, 풍속은 대략 고구려와 같으나 다만 의복은 다르다. 남녀 모두 옷깃이 둥근 옷을 입으며, 남자는 장식으로 넓이가 여러 치(寸) 되는 은으로 만든 꽃을 단다. (漢武帝伐朝鮮 分其地爲四郡 自是之後 胡․漢稍別 無大君長 自漢已來 其官有侯邑郡․三老 統主下戶 耆老老舊自謂與句麗同族 其性愿慤원각 少嗜慾 有廉恥 不請句麗匃 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 衣服有異 男女衣皆著曲領 男子繫銀花廣數寸以爲飾)
單單大嶺에서 以西는 낙랑에 속하고 以東의 7개 縣은 東部都尉가 관리하는데, 그 백성들은 모두 濊사람들이다. 후에 동부도위란 관직을 없애고 그들의 수령을 侯로 봉하였다. 지금의 不耐濊侯는 그 종족이다. 漢말기에는 다시 고구려에 귀속되었다.(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 自領以東七縣 都尉主之 皆以濊爲民 後省都尉 封其渠帥爲侯 今不耐濊皆其種也 漢末更屬句麗)
그곳의 풍속은 산천을 중시한다. 산천에는 경계가 있어서 다른 부락 소유의 산천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한다. 同姓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 꺼리고 피하는 것이 많은데, 질병으로 사망하는 자가 있으면 그가 살던 집을 버리고 새로 집을 짓는다. 麻布가 생산되며, 누에를 쳐서 솜옷을 만든다. 새벽에 별자리를 관찰하여 한 해의 풍년과 흉년을 미리 안다. 珠玉은 보물로 여기지 않는다. 항상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때는 밤낮으로 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는데 이 행사를 ‘舞天’이라고 한다. 또 호랑이를 신으로 섬기면서 제사를 지낸다.(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分 不得妄相涉入 同姓不婚 多忌諱 疾病死亡輒損其舊宅 更作新居 有麻布 蠶桑作緜 曉候星宿 豫知年歲豊作約 不以珠玉爲寶 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祭虎以爲神)
부락 간에 서로 침범하는 일이 생기면 그 벌로 살아있는 소와 말을 바치게 하는데, 이를 責禍라고 한다. 사람을 죽이는 자는 그 벌로 사형에 처한다. 盜賊이 적다. 길이가 세 길이나 되는 긴 창을 때로는 여럿이 이것을 함께 사용하기도 한다. 步兵戰에 능숙하다. 낙랑군의 檀弓은 바로 이곳에서 산출된다. 바다에는 무늬 있는 물고기 가죽이 산출되고, 뭍에서는 무늬 있는 표범 가죽이 많이 산출된다. 또 果下馬라는 왜소한 말이 산출되는데, 漢나라 桓帝 때에는 이것을 중국에 조공으로 바친 적도 있다.(其邑落相侵犯 輒相罰責生牛馬 名之爲責禍 殺人者償死 少寇盜 作矛長三丈 或數人共持之 能步戰 樂浪檀弓出其地 其海出班魚皮 土地饒文豹 又出果下馬 漢桓時獻之)
(*原註: (一)臣松之按:果下馬高三尺 乘之可于果樹下行 故謂之果下 見博物志‧魏都賦): 신 裴松之가 생각하기에 과하마는 그 높이가 약 90cm로, 이것을 타고 과일나무 아래를 지나갈 수 있기 때문에 과하라고 부른 것 같다. 博物志와 魏都賦에 이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魏 帝王의 正始(기원204~249년) 6년(기원245년)에 단단대령 以東의 濊가 고구려에 예속된 것을 이유로 낙랑태수 劉茂와 대방태수 弓遵이 군사를 일으켜 濊를 치니 예의 수령인 不耐侯 등이 城邑을 들어 투항하였다. 正始 8년(247년)에 그들이 찾아와서 조공을 바치므로, 황제는 다시 조서를 내려서 그들의 수령을 不耐濊王에 봉하였다. 이때부터 예왕은 민간에 섞여 거처하면서, 계절마다 郡정부로 찾아와 인사하였다. 낙랑과 대방 두 군에서 군사상 필요에서 인원 징집이나 물자 증발을 하게 될 때에는 濊國 사람들에게도 부담시켰는데, 그들에 대한 대우는 관내의 일반 중국 백성들과 똑 같이하였다. (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 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擧邑降 其八年 詣闕朝貢 詣貢拜不耐濊王 居處雜在民間 四時濊濊郡朝謁 二郡有軍征賦調 供給役使 遇之如民)
참고도서: 朝鮮上古文化史(丹齋 申采浩) 부록 三國志 魏書 東夷傳(박기봉), 처음 읽는 扶餘史(송호정),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이덕일, 김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