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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 古典 한마디 100. 辟不辟 忝厥祖(太甲 上)
26/10/26 11:54:53 金鍾國 조회 61
東洋 古典 한마디 100. 辟不辟 忝厥祖(太甲 上)
 
#辟不辟 忝厥祖(太甲 上)
벽불벽 첨궐조 (태갑 상)
임금이 임금 노릇을 하지 못하면 조상에게 욕이 될 것이다.
 
입금된 자가 임금다운 행동을 하지 않으면 조상을 욕보이게 된다(이윤이 태갑에게 훈계한 말) *벽辟: 임금

 
#<伊尹曰 先王昧爽丕顯>, 坐以待旦(太甲 上)
<이윤왈 선왕매상비현>, 좌이대단(태갑 상)
앉아서 아침을 맞았다.
 
선대의 탕왕은 밤에도 자지 않고 정치에 전념하여 앉은 채로 다음 날 아침을 맞이하였다. (태갑에게 훈계한 이윤의 말)
 
 
#<伊尹曰 … 愼乃儉德, 惟> 懷永圖(태갑의 말)
<이윤왈 … 신내검덕, 유> 회영도(태갑의 말)
먼 장래의 계획을 도모할 것을 생각하라
 
검소한 덕을 쌓고 먼 장래의 계획을 잘 생각하라. (태갑에게 훈계한 이윤의 말)
 
 
#<伊尹曰 …> 習與性成(태갑 상)
<이윤왈 …> 습여성성(태갑 상)
습관이 천성과 더불어 이루어졌다.
 
습관이 붙으면 마침내 그것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천성과 같아진다. (태갑에게 훈계한 이윤의 말)
 
#<太甲曰 …> 天作孼猶可達 自作擘不可逭(太甲 中)
<태갑왈 …> 천작얼유가달 자작벽불가환(태갑 중)
하늘이 만든 재앙은 그래도 피할 수 있으나 스스로 만든 재앙은 도망갈 수가 없다.
 
하늘이 만든 재앙은 피하려고 생각하면 피할 수도 있겠지만, 자기가 만든 재앙은 피할 수가 없다. (이윤에게 한 태갑의 말)
 

#<伊尹曰 …> 奉先思孝 接下思恭 視遠惟明 聽德惟聡
<이윤왈 …> 봉선사효 접하사공 시원유명 청덕유총
선조를 받을 때는 효성을 생각하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는 공손함을 생각하며, 긴 안목으로 멀리 보되 밝게 볼 것을 생각하고, 덕스러운 말을 듣되 귀 밝게 들을 것을 생각하라.
 
 
선조를 받들 경우에는 효성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랫사람에 대한 경우에는 공손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먼 장래의 일을 내다볼 경우에는 밝게 보지 않으면 안 되며, 덕이 있는 사람의 증언을 들을 경우에는 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태갑에게 가르친 이윤의 말)
 

#<伊尹曰 … 惟>天無親 克敬惟親(太甲 下)
<이윤왈 … 유>천무친 극경유친(태갑 하)
하늘은 친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어서 공경을 잘하는 자를 친하게 여긴다.
 
하늘은 특별한 사람을 친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누구라도 좋다. 공경하는 정신을 지닌 사람을 친하게 여긴다. (태갑에게 가르친 이윤의 말)
 
 
#<伊尹曰 … > 民罔常懷 懷于有仁(太甲 下)
<이윤왈 … > 민망상회 회우유인(태갑 하)
백성들은 항상 그리워하는 사람이 없어서 어진 사람을 그리워한다.
 
백성들은 특정한 임금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어진 적이 있는
임금만 따른다. (태갑에게 가르친 이윤의 말)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2a1c0872.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402pixel, 세로 651pixel 그동안 중국고전명언사전에서 따온 글을 실었었는데, ‘동양고전 한마디’라는 제목에 걸 맞게 우리나라 고전의 명언을 소개합니다. 이번 호부터 정다산의 목민심서(丁茶山 牧民心書)를 함께 싣겠습니다. 위키백과에서 인용하여 소개합니다.
愼齋 올림.
 
어린 시절
1762년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마현(馬峴), 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94)에서 태어났다. 정약용이 태어난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이다.[3] 강원도 태백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정선, 영월, 충주, 여주를 거쳐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한다. 현재는 생가터와 실학박물관 등 정약용 유적지가 잘 조성되어있다.[4] 부친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인 고산 윤선도의 오대손녀인 윤소온(해남 윤씨, 조부 윤두서, 부친 윤덕렬)씨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으며, 정약용은 4남 2녀 중 네번째 아들이었다.[5][3] 정약용이 태어난 해에는 영조의 노여움을 산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일이 벌어졌다.(5월) 부친 정재원은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하였고 그해 6월에 태어난 정약용의 아호를 귀농(歸農)이라 지었다.[6] 벼슬을 탐하여 당쟁에 휘말리지 말고 농촌에 귀의하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정약용의 선조들은 8대를 연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모두 홍문록에 올랐는데[7] 고조부, 증조부, 조부의 3대에 이르러서는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3] 아버지 정재원은 1762년 3월에 생원시에 합격한 후에는 대과에 응시하지 않았다. 출세에는 큰 욕심이 없었기에 사돈인 채제공이 대과 응시를 여러차례 권유하였으나 마다하였다.[8] 뒤늦게 음관으로 벼슬길에 나간것은 생활고 때문이었으며[9] 호조좌랑, 울산부사, 진주목사(정3품)까지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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